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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럼 Nov 14. 2019

내가 슬픈 건 죽어야 해서가 아니라 죽을 수 없어서야.

잘 죽는 법, 웰다잉(Well-Dying)의 첫걸음

"나는 행복하지 않아요. 죽고 싶어요. 슬프냐고요? 아뇨. 내가 슬픈 건 죽어야 해서가 아니라 죽을 수 없어서입니다."


- 104세에 의사 조력 죽음을 통해 사망한 故 데이비드 구달 박사 -





무슨 주제로 글을 쓸지 고민하던 찰나, 문득 영화 코코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흔히들 ‘하늘나라로 갔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은 망자들의 세계에서 술도 마시고 시시콜콜한 농담도 나누며 살아생전과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이승에서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으면 망자들의 세계에서도 소멸하게 된다. 두 번째 죽음,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처음 접하는 발상이 신선하고도 슬펐고, 사람이 진정으로 죽는 순간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혔을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리멤버 미, 리멤버 미" 미구엘이 부르던 노래가 귓가를 맴돌고 영화가 주는 미묘한 여운에 젖어있을 때쯤, 이윽고 이런 궁금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일 당장 죽는다면 나는 어떤 말들로 정의될까? 나는 남겨진 자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잘 죽어야 잘 사는 시대가 왔다.


마지막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중요한 일이다. 웰빙에 이어 죽음을 맞이하자는 운동인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웰다잉이란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것에서 나아가 죽음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것까지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준비의 첫걸음, 유언장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유언장 작성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언에 관해 형식주의를 취하고 있으므로 형식을 지키지 않은 유언장은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유효한 유언장을 작성하려면 어떤 점을 지켜야 할까? 먼저, 유언장의 내용 전체를 반드시 자필로 작성해야 한다. 유언장에는 유언의 내용과 작성일자, 유언자의 주소와 함께 이름, 날인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며 이 중 하나라도 누락된 유언장은 효력이 없다.


작성일자는 연, 월, 일까지 모두 기재해야 하고 '2019년 초겨울' 등으로 날짜를 특정하지 않은 유언장은 효력이 없다. 또한 유언자가 평소 생활하는 곳의 상세주소를 정확하게 써야 한다. 대법원은 '암사동에서'라고 작성한 유언장에 대해 주소를 특정했다고 볼 수 없다면서 그 효력을 부정한 바 있다.


아울러 이름은 평소 사용하던 별명이나 예명을 써도 무방하다. 누구인지를 특정할 수 있다면 본명을 기재하지 않아도 된다. 마지막으로 도장을 날인하여야 하는데 도장이 없다면 지장으로도 충분하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다.


사는 것도 어렵지만 죽는 것도 사는 것 못지않게 어렵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카탈로그’라는 책을 쓴 요리후지 분페이는 웰다잉을 ‘이불을 개는 것’에 비유했다. 아침에 눈을 떠 이불을 개는 것처럼 매일 나의 하루를 조금씩 정리해두자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뒤로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은 점점 확신으로 바뀐다. 그뿐인가?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잃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의사 조력 죽음으로 104세에 생을 마감한 데이비드 구달 박사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늙고 있습니다. 시력을 포함한 내 모든 능력이 퇴화했습니다. 이제 집에 24시간 갇혀있거나 요양원에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아요. 죽고 싶습니다. 슬프냐고요? 아뇨, 내가 슬픈 건, 죽어야 해서가 아니라 죽을 수 없어서입니다.”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존엄사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됐다. 물론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메멘토 모리라는 라틴어처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이불을 개듯 천천히, 마주오는 죽음에 대비하는 것은 어떨까.


거창한 유언은 아니더라도. 남은 사람들이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메시지를 남기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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