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언 May 16. 2022

기내 수하물 7kg으로 떠난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하며


_세계여행의 시작

“평생 꿈인 세계여행을 가고 싶어. 진심으로 너와 함께 하고 싶지만 너의 선택을 존중해. 네가 한국에 남겠다면 혼자라도 다녀올게.”


떨어지는 벚꽃 잎 때문인지, 아니면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코앞에 다가와 설렌 건지 잘 모르겠다. 붕 뜨는 마음을 숨기고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지태에게 말을 꺼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게 뭐든 따라주던 그였지만 세계여행을 함께 가자고 조를 수는 없었다. 안정적인 삶에 가치를 두고 일상의 안온함을 사랑하는 그였으니까.


영화 《작은 아씨들》의 맏이 메그 마치가 결혼하는 날, 모험을 좋아하는 둘째 조가 “시시한 결혼일랑 하지 말고 함께 도망가자.”라고 했을 때, 메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 꿈과 내 꿈이 다르다고 해서
내 꿈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누군가에겐 모험이 없는 하루는 평범하고 시시한 일상이라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태는 하루빨리 경력을 쌓아서 자리를 잡고 싶어 했다. 세계여행을 떠난다면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막연한 ‘언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함께 가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거절이겠지, 생각하며 며칠이 흘렀을까. 그가 말했다.


“그래, 같이 가자.”


결심하기까지 나의 설득도 있었겠지만 회사의 계속되는 거짓말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교수님이 본부장으로 있는 유명 건축회사에 추천받아 들어갔다. 정직원 채용을 약속받고 입사했지만 본부장은 사정이 좋지 않다며 말을 바꿨다. 조만간 정직원으로 전환해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일 년 가까이 계약직이란 이유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았다. 똑같은 시간에 동일한 업무를 해도 월급은 더 적었다. 야근해도 (정직원은 지급되는) 택시비가 나오지 않았다. 정직원 카드키가 없어서 프린트나 복사도 마음대로 못했다. 급할 땐 다른 사람의 카드키를 빌려서 해결해야 했다. 기약 없이 계약직으로 계속 있느니 세계여행을 가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그가 사표를 낸 것이다.


3개월 뒤 한국을 떠야겠다는 결심 후에 닥쳐온 것은 현실이란 칼바람이었다. 집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방을 빼겠단 소리에 집주인은 100만 원을 요구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했던가. 하루하루 이사 갈 날짜는 다가오는데 부동산에선 연락이 없다. 그래 까짓 100만 원, 아깝지만 별수 있나. 세계여행이 더 중헌디.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방 빼기 하루 전, 기적처럼 다음 세입자가 나타났다!




_여행의 시작은 짐 싸기부터

세계여행을 가기로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비싼 속옷 가게에 들른 것이다. 속옷 가게를 지날 때마다 쇼윈도에 걸려있는 빨갛고 야한 팬티를 보면서, 나는 차마 못 들어가겠다, 생각했던 그곳을 말이다.


“뭘 찾으세요?”


멀뚱히 서 있는 우리에게 점원이 물었다.


“저... 빨리 마르는 팬티 두 장만 주세요.”


점원은 와인 색상의 망사 재질로 된 팬티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땀도 빨리 흡수하고, 빨래해도 금방 말라요.”

“아, 그럼 이거로 할게요.”


더 둘러보지도 않고 점원이 건네준 와인색 팬티 두 장을 결제했다. 이제 이 팬티 두 장으로 일 년을 살아야 한다.


집으로 돌아와 세계여행에 가져가고 싶은, 혹은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늘어놓고 고민에 빠졌다. 짐을 얼마나 싸야 할까? 지태와 나는 평생 저체중에 저질 체력으로 살아왔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안부 인사 대신 이렇게 말했다.


“요즘 살이 더 빠졌네.”


그의 몸무게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는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 웃고 말았다. 체력이 없으니 가방 쌀 때 더욱 신중해야 했다. 다른 여행자들을 보면 앞뒤로 가방을 20kg씩 메고 다니던데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우리에겐 10kg도 무리인데. 비행기를 탈 때마다 추가 수하물을 구매하는 것도 가벼운 통장잔고에 미안한 일이다. 무료 기내 수하물인 7kg에 맞춰 짐을 싸기로 했다. 그런데 화장품은 어쩌지? 어쩔 수 없이 미모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한 블로그에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꼭 가져가고 싶다면 그냥 챙기세요!
여행 오면 안 챙긴 걸 후회합니다!”


못 이기는 척 화장품 파우치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남는 건 사진뿐인데 예쁜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 그리고선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디카는 챙기지 않았다. 요즘은 휴대폰이 더 잘 나오니까. 딱 10년째 꿈만 꾸던 세계여행을 떠난다. 늘 시간과 돈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문제는 용기가 아니었을까.


여행을 떠나는 날, 공항까지 배웅해준 절친 현미와 막냇동생 희옥이를 뒤로하고 출국장에 들어섰다. 몸집만 한 배낭을 메고 기념사진을 한 장 찍는데 지태가 말했다.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출간 기념 연재는 매주 월요일 브런치로 발행됩니다.



구매 링크



교보문고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구매 링크

http://kyobo.link/AdF4


예스24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구매 링크

http://m.yes24.com/Goods/Detail/108803136


알라딘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구매 링크

http://aladin.kr/p/0fC4E





매거진의 이전글 잉어는 사는 곳에 몸 크기를 맞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