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발리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배경이 되어 유명해진 빠당빠당 비치. 이제는 조금 능숙해진 오토바이를 몰고 빠당빠당 비치로 향했다. 오토바이에 서핑보드를 싣고 가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걸 보니 목적지에 거의 다 왔나 보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 누드 비치로 유명했다는데 와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모르고 지나치기 딱 좋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니 작은 해변이 나타났다. 영화 개봉 후에는 관광객이 많아져 누드 비치로서의 명성은 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모여 태닝이나 서핑을 하고 있었다. 수영복을 가져올 걸, 잠시 생각했지만 아쉽지 않다. 내일 또 오면 되니까.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생각했다.
‘이래서 한 달 살기가 좋구나.’
고소한 냄새가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발리에 오면 꼭 먹어보라던 그릴에 구운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옆에서는 예쁜 비치 스카프와 수영복도 팔고 있었다. 한참을 서성거리며 고민하고 있으니 주인아줌마가 말을 걸었다.
“둘 다 사면 반값에 줄게.”
주인아줌마의 윙크에 못 이기는 척 지갑을 열었다. 저 멀리 옥수수를 들고 걸어오는 지태가 보였다. 발리 느낌이 물씬 나는 비치 스카프와 비키니를 그에게 펼쳐 보였다. 내가 비키니를 사다니. 한국이었다면 살까 말까 100번은 고민하다 안 샀을 것이다. 점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신기하다. 그런 용기가 자꾸 생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용기.
장바구니에 담긴 꽃무늬 원피스를 한참 보다가 화면을 꺼버린 적이 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스타일이라 두려웠다. 돈을 날릴까 봐, 어색할까 봐, 실패할까 봐. 그동안 나한테 어울릴 것 같은 옷만 찾아다녔다. 입어보고 싶어도 주위에서 “너랑 안 어울려.”라고 말하면 내려놓았다. 화장품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장품 파우치 속에는 언제나 비슷한 색상의 립스틱만 가득했다. 오렌지 색상의 립스틱을 한 번 발라보면 어떨까, 생각은 해봤지만 실제로 해본 적은 없었다. 내 피부색과 안 어울릴 것 같다는 점원의 말 때문이었다.
여행 떠나기 전 미용실에 들렀다. 애지중지 길러오던 긴 머리를 자른 것이다. 긴 머리를 유지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샴푸 후 트리트먼트는 물론 헤어 에센스를 바르지 않으면 긴 머리가 엉키고 빠지고 난리가 난다. 무료 수하물 무게에 맞춰 짐 가방을 꾸린 장기 여행자에게 트리트먼트나 드라이기는 사치다. 긴 머리를 포기할 수밖에. 아쉬운 마음에 미용실 사장님에게 유명 연예인 브릿지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저 브릿지도 넣고 싶은데.”
사장님은 내가 가져온 사진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브릿지 넣지 말아요!”
“나중에 개털 되는데?”
“정 하고 싶으면 브릿지 가발 있으니까 그거 사서 몇 번 기분이나 내든지!”
단호한 세 번째 거절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돈을 쓰고 싶다는데 말려주다니 너무 친절한 사장님 아닌가. 그렇게 머리만 자른 채 미용실을 나왔다. 그게 지금까지 후회가 된다. 그깟 머릿결이 뭐라고. 상하면 자르고 다시 기르면 되는 건데. 역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특히나 나의 포기가 주변 사람의 만류 때문이라면 더더욱 휩쓸리지 말아야겠다.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후회는 오롯이 내 몫이니까. 꽃무늬 원피스도, 오렌지 립스틱도 그렇다. 그동안 왜 그렇게 참고 살았을까? 꼭 잘 어울리는 것만 해야 할까? 애당초 그런 건 누가 정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선택의 기준이 바뀌었다. ‘이 립스틱 색상이, 옷 디자인이, 헤어스타일이 나에게 어울릴까?’라는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해보고 싶어? 그럼 해봐!”
안 어울려도 괜찮다. 입고 싶은 옷을 입자. 이 말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 나 자신을 평가하거나 점수를 매기지 말아야지.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오지랖 부리지 않을 거야. 대신 이렇게 말해줘야지.
“하고 싶으면 그냥 해. 네 마음이 가장 중요하니까.”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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