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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언 May 30. 2022

행복하게 사는데 필요한 것은 별로 없다

태국 끄라비


꿈같은 발리 여행을 마치고 동남아 일주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서 기분이 좋았으나 경유지였던 말레이시아에서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 검색대 입구에서 직원 두 명이 가방 무게를 검사하는 것이었다. 급하게 발을 돌려 구석에 있는 저울에 가방을 달았다. 내 가방은 10kg, 지태 가방은 12kg으로 무료 수하물 무게인 7kg을 훌쩍 넘겼다. 짐이 언제 이렇게 늘어났을까. 아까운 것들을 잔뜩 버리고 옷을 두세 겹 껴입었다. 무거운 물건은 비닐봉지에 별거 아닌 척 집어넣어 배낭 무게를 맞췄다. 자연스럽게 입구를 지나는데 직원이 불러 세울까 봐 조마조마했다. 검색대를 한참 지나 껴입은 옷을 벗으며 생각했다.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무겁게 들고 다녔는데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네.’


그리고선 면세점에서 바비 브라운 립스틱을 샀다.




이름도 생소한 태국 끄라비에 온 이유는 SNS에서 스치듯 봤던 사진 한 장 때문이다. 인생 사진 하나 건지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등산은 저질 체력 탓에 고작 30분도 못 가고 후회로 변해버렸다.


전망대에 힘들게 도착했으나 또 다른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곳은 사진 찍기도 고통스럽고 찍히기도 고통스러운 낭떠러지 그 자체였다. 지태는 토할 것 같다며 사진 찍기를 포기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아무렇지 않은 척 절벽 끝에 다가가 앉았다. 바람이 솔솔 불 때마다 깃털보다 무거운 내가 천 리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두려워 속이 메슥거렸다.


지태의 오케이 사인을 듣고 후들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지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서 돌 아래로 내려왔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처럼 절벽에서 서서 찍었다간 여행 가기 전 가입한 여행자 사망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산하려니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큰일이다. 빨리 내려가야지.


먹구름이 몰려오는 끄라비 탑칵항낙 전망대에서


정수리에 차갑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이마로 흘러내려 와 시야를 가렸다. 먹구름도 갈수록 몰려오는지 방금까지 환했던 숲이 어두워지고 있다. 이대로 산에서 길을 잃으면 어쩌나, 발걸음을 재촉했다. 땅은 젖어서 질퍽했고 신발은 진흙 때문에 더러워졌다. 습한 날씨와 땀이 뒤엉켜 몸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다행히 지나가는 소나기였던지 비가 멎고 해가 떴다. 다시 비가 올까 봐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욕조에 뜨끈한 물을 받고 한껏 여유를 부렸다. 핸드폰에서는 마침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 너무 좋다. 진짜 행복하다.’


온몸이 찝찝하긴 했지만 비 오는 날 등산도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맞으며 걷는 일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늘 비를 피하기만 했었는데 말이다. 우산이 없을 때 내리는 비가 즐거울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_행복의 조건

공항에서 뺏기듯 물건을 버린 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필요하다고 믿었던 물건들이 없어졌는데 내 여행은 생각보다 불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점도 있었다. 가방이 가벼워져서 걸을 때 힘들지 않았고 챙길 물건이 줄어들어서 정리하는데 쓰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비우면 비울수록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워본 적이 없어서 했던 생각이었다.


세계여행을 잘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중요했다. 모든 욕심은 이고 다닐 짐이 되고, 한순간의 욕심은 허리와 무릎, 가벼운 통장에까지 고통을 준다. 짐을 줄이기 위해 버릴 물건을 고르면서 이것이 정말 필요한 물건이었는지, 나의 욕심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행복하게 사는데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물건 욕심이 사라지고 있다. 물건을 사면서 허기진 행복을 채우던 내가 깨닫게 된 것이다.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한때 행복이란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라고 생각했었다. 소나기가 내릴 때 가방에 우산이 있는 것만 행복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바로바로 구매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행복할 수 있는 건데 그러지 못했다. 집에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 의자가 부족할까 봐 혼자 살면서 4인용 식탁을 들였다. 그냥 바닥에 앉아도 되는 일인데 조금의 부족함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행복하게 사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왜 이리도 많던지.


이제야 알겠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았다. 갑자기 비가 내리는 날, 우산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 함께 걷는 사람이 좋아 행복할 수 있고, 비에 젖은 상대방의 모습이 웃겨서 행복할 수 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우연히 들린 카페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 행복할 수 있고, 비가 내려서 마중 나왔다는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


오랫동안 행복이란 무엇일까 고민해왔다. 오늘에서야 나의 행복을 정의 내린다. 하면 기분 좋아지는 일 목록에서 하루에 한 개만 해도 만족스러운 하루, 완벽한 하루, 행복한 하루이다. 하면 기분 좋아지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거품 목욕하기와 낮잠 자기, 카페에 앉아 사람들 구경하기, 쌀국수 먹으러 가기 그리고 당신과 데이트하기.


행복하게 사는데 필요한 것은 정말 별거 없구나.



번외

물건을 비울수록 물건 욕심은 날마다 사라지는 데 반해 여행 욕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만 간다. 여기까지 왔는데 돈을 좀 더 들여 근방의 여행지까지 가보고 싶다든지, 여기 너무 좋은데 일정을 좀 더 늘리고 싶다는 생각은 끝이 없다. 남은 돈과 시간은 정해져 있고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는데, 모두 소중해서 답도 없는 예산과 일정표만 쳐다보고 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포기에 세트처럼 딸려오는 아쉬움과 후회는 언뜻 보면 마이너스 같지만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을 주기 때문에 결국 플러스다. 그 힘으로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지지 못한 것을 적게 후회하고 내가 가진 오늘을 더 많이 누리기로 하자. 그게 물건이든, 여행이든 말이다.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출간 기념 연재는 매주 월요일 브런치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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