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경험 안에 통합되고 있는 별별 일들
이름도 모르는 후배가 모교 경력개발센터에서 저를 소개받았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BX디자이너로 취업하고 싶다고, 스무고개처럼 질문 다발을 보냈습니다. 요약하면, BX디자이너가 회사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어떤 팀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선에서 최대한 설명해주었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커버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 몇 년 사이에 ‘BX디자인’이라는 포지션을 구하는 회사들이 꽤 보이는데요, 다른 분야에 비해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가 첫 취준을 했던 2015년 무렵에도 그랬고, 디자인 커리어 관련 컨텐츠가 넘쳐나는 요즘에도 추상적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추측해봅니다.
먼저, 한 사람이 다양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간략히 설명하다 보면 뭉뚱그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온오프라인 전반의 디자인을 통일성 있게 관리하는…이라는 설명을 보면 온오프라인이 대체 어떤 매체를 말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생기기 마련인데 자세히 풀어주는 JD는 잘 없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저만 해도 로고나 인쇄물 외에 웹사이트를 만들기도 하고, 급하게 촬영 소품을 사러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적용 매체와 상관없이 프로젝트 단위로 업무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규모가 큰 디자인 조직이 있는 몇몇 회사들의 경우 포지션을 상세히 나누어 전문적으로 인력을 채용하기도 합니다만, 아시다시피 그런 자리가 많지는 않습니다.
다음으로, 회사에 따라 일의 범주가 많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화장품 회사와 게임 회사 BX디자이너는 포지션 명만 같을 뿐이지 비슷한 커리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화장품 회사에서 아기자기한 룩앤필의 신제품을 런칭하는 과정을 상상해봅시다. 귀여운 스타일의 일러스트 작가를 섭외하고, 용기를 수배하고, 어디에 표기사항을 넣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게임 회사에서 이런 일을 할 기회가 있을까요? 같은 IT 업계로 영역을 한정 지어 살펴봐도 일의 범주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인쇄 업무를 주로 하는 포지션도 있고, 앱용 그래픽 에셋 작업을 주로 하는 포지션도 있습니다. (한 명이 둘 다 하는 경우도 있고요.) 전자의 경우 종이나 분판에 대한 이해도가 필요하고, 후자의 경우 모션을 다루는 사람이 유리하겠죠. 덧붙여, BX 업무에 영상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방송국이나 MCN이라면 특히 그렇겠죠. 반면 영상팀을 따로 분리해서 운영하는 회사도 존재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BX디자이너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건 대학생뿐만 아니라 경력직으로 이직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마다 하는 일이 다르니 업무 경험을 살려 이직하는 게 까다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만해도 BX라는 소개만 보고 제 경험과 동떨어진 회사 추천을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어렴풋이나마 공통점이라고 결론을 내린 건, 비주얼을 만드는 역량과 더불어 프로젝트를 매니징 하는 역량이 꽤나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회사 내부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사업 상황에 대한 이해와 기획력도 어느 정도 필요하고, 큰 프로젝트일수록 적용 매체가 다양해서 일정 관리가 정말 중요합니다. 외주를 주거나 굿즈를 만드는 경우, 리드타임을 산정해 유관부서와 소통하는 일도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네 개의 회사를 거쳐 곧 8년차에 접어듭니다. 바쁘단 핑계로 언젠가 브런치 해야지 노래만 부르다 이제라도 마음을 먹은 이유는, 까마득하게 막막했던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인하우스 BX디자이너가 하는 일을 궁금해하시는 분들께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해온 일들은 유명 에이전시나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작업처럼 본새 나진 않지만, 화원을 가꾸는 일처럼 물을 주고 기르면서 브랜드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습니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에서 브랜드의 스케치 단계를 함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서비스로 커가는 모습을 지켜봤던 경험은 여전히 두근거리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에 저는 꽤 긴 기간을 사수 없이 일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했었는데요, 몇 년이 지나서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엄청난 크리에이티브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기획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피드백에 열려있다면 충분히 브랜드 업무를 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하우스에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아트웍보다는 논리 정연함과 순발력이 필요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미리 해주었다면 그동안 조금 덜 불안했을 것 같네요.
연차는 쌓이는데 기억력은 점점 나빠져서, 직접 부딪치며 배운 것들도 기록하지 않으면 흐려지는 걸 느낍니다. 릴리즈한지 몇 년 된 작업들도 기억을 더듬어 이것저것 남겨보려고 합니다. 그저 흔한 디자이너 1인지라 대단한 비결이나 비밀은 없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얘기 정도는 진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회사마다 직무의 결이 매우 다르기에 제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결과가 어쨌든 과정에서 배운 불완전한 것들도 터놓고 나누는 분위기가 이 씬에 생기길 바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