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직무 전환에 관련된 생각
주변 디자이너 분들이나 제가 멘토링 했던 학생 분들께 제일 많이 받았던 질문이 있습니다. ’패키지 디자이너에서 BX 디자이너로 어떻게 전향하셨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첫 취업을 했던 스물넷에는 큰 꿈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인쇄물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인쇄 업무가 있는 포지션에만 지원하다가 중견 식품회사에 패키지 디자이너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각성이 시작된 건 이 회사를 다니면서부터였는데요, 이때가 온라인 식품 시장이 열리던 시기였는데, 제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그저 관망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계속 이런 환경에서 인쇄물 작업만 한다면 비슷비슷한 식품 회사로밖에 이직을 못하겠구나, 온라인 업무를 같이 할 줄 아는 사람이 앞으로 이직하기 유리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회사에서 벌써 이직 생각을 하다니 프로 이직러의 싹이 보였죠.
저는 어리고 잃을 게 없었던지라 겁도 없이 1년 뒤에 이커머스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해버립니다. 당연히 연봉은 훨씬 낮았습니다. 그치만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면접을 볼 때부터 두근거렸습니다.
제가 입사했을 때 1년을 갓 넘겼던 이 회사는 3년만에 10배 넘게 성장을 했습니다. 저는 원래 패키지, 편집물 담당 포지션으로 입사했는데, 일은 밀려오고 사람은 부족하다보니 모든 디자인 업무를 겸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됩니다. PB 출시할 때 필요한 로고, 일러스트 작업 외에도, 감성 사진으로 톤을 만든 서비스라 촬영 기획, 현장 디렉팅은 기본 루틴이었습니다. 저는 꽤 초기 입사자에 속해서, 앱에서 중요한 개편이 있을 때는 GUI 가이드를 잡기도 했습니다. 학생 때 UI 수업을 들은 적도 없었는데, 그냥 퇴근하고 UI 기초 수업을 인강으로 듣고 스케치를 배워서 작업했습니다. 영상 툴은 기본적인 건 다룰 줄 알았던 터라 서비스 런칭 초기에 디지털로 집행했던 광고들은 직접 편집해서 나가기도 했었네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게 말이 되나 싶은데 그때는 서비스와 함께 성장해간다는 짜릿함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제가 입사했던 디자인팀이 인원이 많아지면서 BX팀, UX팀 등등으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BX팀 소속이었고, 그 뒤로 이직한 회사들에서는 자연스럽게 온오프라인 매체를 겸하는 넓은 범위의 프로젝트들을 맡고 있습니다.
성장 가능성 있는 스타트업을 어떻게 초기에 알아보셨나요? 라는 후속 질문을 해주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스타트업 성공 비율이 극히 낮다는 걸 감안하면 저는 운이 무척 좋은 케이스일 거예요. 그래서 작은 조직에서 주도적으로 업무하며 직무 전환을 해보세요, 라고 무턱대고 모든 분들께 권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결심했을 때 저는, 그 회사가 유니콘이 되리라는 기대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톤을 가진 서비스이기에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보고 싶던 업무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해서 주어졌기에, 힘들지만 배우는 게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물론 사수는 없고 혼자 배우는 거긴 하지만요ㅋㅋㅋ)
만약 결심을 하셨다면 실행은 빠를수록 좋겠죠. 여기서 내가 뭔가 펼쳐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드는 곳을 고르신다면, 그 스타트업이 잘 되지 않는다한들, 업무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성취하는 게 분명히 있을 거예요. 서비스를 직접 이용해보고, 앱이 있다면 구석구석 눌러보고, 기사나 대표 인터뷰도 찾아보고, 관심을 가지고 계속 살펴보다 보면 그런 회사를 만나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