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동안 디자이너로 N개의 회사를 다니며 남은 것
출근길에 항상 마주치는 능소화 덩굴에 올해는 유난히 오래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 사이 장마와 태풍, 그리고 땅이 녹아내릴 듯한 폭염이 지나갔습니다. 유난히 궂은 여름 날씨에도 주렁주렁 피어있던 꽃이 이제 좀 살만하다 싶은 날씨에 지고 있네요. 비현실적일 정도로 해사한 꽃송이들이 한 움큼씩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며 새삼 여름의 끝을 실감합니다.
2019년 가을, 삼 년 반을 몸담았던 스타트업을 떠나며 저는 늦은 사춘기 같은 것을 겪었습니다. 당시에 다음 행선지로 향하며 제가 바라던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배울 점이 많은 동료들(특히 디자이너가 많은 회사), 그리고 더 넓고 깊은 업무 경험.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완벽히 충족시키는 곳을 찾기란 당연히 쉽지 않았죠. 그래서 다음 회사는 좀 다르지 않을까, 무지개를 쫓는 마음으로 옮겨 다녔던 것 같아요.
초심자의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 과정에서 이상하리만치 연차에 비해 큰 프로젝트들이 턱턱 주어졌고, 그 결과물 덕분에 몇 번의 이직 제안이 이어졌습니다. 더 큰 성장을 외치며 스타트업을 박차고 나온 뒤의 몇 년이 이런 씩이나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재밌었다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궂은날에 피는 꽃 같았습니다. 돌아봐도 참 열심히 했습니다. 정말 바빴던 시기에는 건강이 많이 상해서 수술도 한 번 했고, 보험이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네요. (ㅋㅋ)
아무튼, 믿기지 않지만 이제 내년이면 10년 차에 접어들고, 날삼재와 함께 질풍노도의 시기도 저물어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 직장은 오래오래 다녀야겠다는 마음이고요. 업계로는 식품, 뷰티, 커머스, 규모로는 스타트업, 중견, 대기업을 거쳤네요. 그렇게 옮겨다니면 뭐가 남나, 종종 듣는 핀잔에 대한 오늘의 제 답은 이렇습니다. 첫번째는 "여전히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 새로운 게 나오면 배우고 싶고, 멋진 사례를 보면 아직도 뭔가 벅차오를 때가 있는 게 저도 가끔 신기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단연 "사람". 거쳐온 회사 동료들과는 여전히 종종 연락하고 만나서 밥도 먹습니다. 어렸을 때 사귄 친구들과는 또 다른 전우애 같은 게 있거든요. 그때 우리 진짜 별 걸 다 열심히 했지, 다시 들춰보게 되는 장면들을 나누는 사이. 말도 안 되는 일도, 너무 많은 양의 일도 좋은 동료가 곁에 있다면 차근차근 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다른 직군의 동료에게도 배울 점이 많다는 걸 진심으로 깨달은 것이 제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큰 수확입니다. 이런 경험 덕분에 회사를 고르는 기준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시니어로 접어드는 문턱에서 고민하는 직장인 분들을 제 주변에서도 많이 봅니다. 더 늦기 전에 내 거 차려봐야 하나, 다른 업계에 도전해봐야 하나 등등. 고민의 모습은 제각각이겠지만, 저는 ‘열심’과 ‘좋은 동료’가 남아있다면 그걸로 지난 직장생활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닥에 떨어져도 존재감을 뿜어내는 능소화 꽃잎처럼요. 항상 맑은 날만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지만, 다음 여름이 오면 또 태풍을 뚫고 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