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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유진 Jun 15. 2020

저, 엄마 아닌데요

지난달에는 후원금이 평달보다 많이 들어와 자금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두 달 전 유치원 나이 때의 녀석들과 몸싸움을 하며 놀다가 발견한 빅터(가명)의 새카만 어금니가 생각났다. 코로나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으니 이 기회에 치과에 한 번 가기로 했다.


원래 저렴한 공립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치과 치료는 워낙 문전성시라 새벽 5시부터 대기하고 번호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루에 5명 이내로만 진료를 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거나 자리를 비우면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보채는 다섯 살 배기를 둘러업고 대기하기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비싸다고는 들었지만, 이빨 하나당 5만 원 정도면 치료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고 오후에 사설 병원에 가기로 했다.


태국의 사설 클리닉은 특이하게도 저녁 6시 이후 개원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큰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이 퇴근 후 개인병원에서 투잡 형태로 진료를 보는 시스템이라 그렇다고 한다. 결전의 날, 빅터에게 특별히 바깥에서 저녁식사를 사 주겠다고 꼬셨다. 녀석은 신이 나서 동년배 아이들에게 나는 누나가 밖에서 밥을 사 주겠다고 했다고 10번도 넘게 자랑하며 차에 올라탔다.


막상 음식점에 들어서자, 평소엔 웬만한 부녀회장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말이 많던 녀석이 식당 사장님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수줍어하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24시간 먹을 것을 거절하는 적이 없는 식탐 대마왕이 앞에 놓인 볶음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창 밖 동네 구경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여기 와 본 적 없어?"

"응."

"여기 요크 누나 (보육원 스태프의 딸) 동네야. 저쪽에 누나 집 있어."

"여기 집 되게 좋다..."


요크네 동네는 저소득층을 위해 정부에서 지은 보급 주택촌이다. 생후 6개월에 정신이 온전치 못하던 엄마와 함께 보육원에 맡겨진 빅터의 세상에서 2층 건물은 보육원 내 최고 신식 건물인 학교뿐이었다. 좁든 날림으로 지었든 간에 모두 2층으로 지어져 있는 그 빌라촌은 아이의 눈에는 놀랍게 보였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녀석에게 미안해졌다.


깨작이는 녀석을 다그쳐 겨우 밥을 먹여 개원 시간에 맞춰 치과에 도착했다. 치과 특유의 냄새 때문인지, 흰 옷을 입은 간호사 누나들을 처음 보아서인지, 아니면 밖에 자동차가 너무 많아서인지 녀석은 식사 때보다도 더 조용해졌다.


"빅터 어머님, 서류 작성 부탁드립니다."


졸지에 어머니로 불린 나는 충격에 벙 찐 얼굴을 하고 서류를 받았다. 녀석은 여전히 멍하게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빅터의 이름과 주소 따위를 적으며 나는 맞춤법을 틀렸을까 내심 걱정하였다. 


"환자분 신분증 주세요."

"어... 아직 없는데요."

"의료보험은요?"

"없어요."


간호사가 흠칫 놀란 눈치로 나를 훑는다. 삐뚤빼뚤한 글씨 하며 어딘가 어눌한 말투, 신분증 이야기에 움찔하는 것까지. 그는 아마 나를 초등교육도 받지 못한 무국적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 기다리자 빅터의 이름이 불렸고, 나는 녀석의 작은 손을 잡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앉아 보는 치과 의자가 낯선 녀석은 엉덩이 부분쯤에 살짝 걸터앉아 있다가, 의사 선생님이 누우라고 하자 그 부분에 벌러덩 들어 눕는 몸개그를 시전 했다. 방 안에 있던 어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같으면 본인도 멋쩍게 웃었을 녀석이, 역시 잔뜩 긴장했는지 웃음기 없는 상태로 나의 손을 의지해 자세를 고쳤다.


"오른쪽 어금니가 썩어서 며칠 전부터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잇몸이 부은 것 같아요."

"네. 어머님, 아이 마스크 좀 벗겨 주세요."

두 번째로 불린 익숙지 않은 이름에 다시 놀라 허둥지둥 아이의 마스크를 벗겼다.

"아ㅡ 해보세요!"

빅터는 의젓하게 입을 벌렸다. 왼쪽, 오른쪽 뺨을 번갈아가며 빛을 비추어 보던 의사가 옆에 있던 간호사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아이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음을 직감했다.

"어머님, 심각하게 썩은 이가 총 4개입니다."


"아... 저... 어머니 아닌데요."


하필이면 이 시점에 아이의 어머니가 아님을 시인한 것은 이빨이 네 개나 썩었다고 이야기할 때 나를 바라보는 의사의 눈빛이 나를 책망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아이의 어금니가 네 개나 심각하게 썩을 때까지 손을 놓고 있는 무심한 엄마가 아니라고 변호하고 싶었다.


"그러면 아이랑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다음 질문이 나오고 나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처음 오는 치과에서 눈부신 빛 아래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고 나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아이도 나를 엄마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으니 내가 엄마가 아니라고 했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처음 보는 이들 앞에서 굳이 아이의 배경이 어떻고 시설이 어떻고 하며 떠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머뭇거리며 나는 봉사자라고 소개했다. 다행히 의사는 더 캐묻지는 않았다.


네 개 모두 치료가 가능한지 엑스레이 촬영을 해 보자고 했다. 나는 아까의 사건 때문에 아직 머리가 멍해서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불가피한 지출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엑스레이 촬영 후 의사는 하나는 너무 많이 썩어서 뽑아야 하고, 나머지 세 개는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치료비는 개당 무려 20만 원이었다. 


분명히 내가 듣고 온 가격은 5만 원 정도였는데... 빛을 비추어 본 아이의 어금니 상태를 보니, 신경치료가 필요해 가격이 올라간 것 같았다. 하지만 세 개를 모두 신경치료를 하고 나면 다른 아이들의 충치는 손도 대지 못할 것이었다. 치통이 있는 녀석들이 더 있는데 말이다.


이글거리는 진료 의자의 불빛 아래 진짜 내 아이였다면 20만 원 이어도 치료를 해 달라고 했겠지,라고 생각하며 머뭇거리는 나를 바라보는 의사의 눈빛에 나의 마음이 밝히 읽히는 듯했다. 빅터는 눈이 부신지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일단 제일 많이 썩은 이빨은 발치해 주세요. 나머지는 상황을 봐서 다시 내방할게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간호사가 마취 주사를 들고 왔다. 혹시 주삿바늘을 쳐낼까 싶어 배꼽 위에 포개진 아이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아이의 손은 작고 따끈했다. 


녀석은 의연하게 마취 주사를 맞았고 칭찬을 받았다. 마취 기운이 올라오기를 기다린 후 본격적인 발치가 시작되었다. 남의 이빨을 빼는 광경을 보는 것은 내 일생에도 처음이었다. 아까의 성공 덕인지 자신 있는 눈빛으로 입을 벌렸던 녀석은 이내 소리 내어 울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녀석의 작은 입에서 핏물이 솟구치는 것을 보자 나의 아랫배에도 시릿한 느낌이 올라왔다. 온 힘을 다해서 아이의 손을 배꼽 위에 내리누르며, 울면서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쳐다보았다. 계속 아이를 쳐다보면 나도 울어 버릴 것 같았다.


강렬했던 수 분 후 발치가 끝났다. 녀석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있다가, 간호사가 큰 박스를 들고 와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고르라고 하자 버선발로 뛰어나가 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손바닥만 한 아이언 맨 피겨를 찾고 나서야 녀석은 솜뭉치를 문 채로 환하게 웃었다. 기증품이 아닌 새 장난감을 받는 일은 꽤 드문 일이었다.


"빅터 어머니... 아니, 보호자분 수납하겠습니다."


신이 나서 아이언맨 장난감을 만지작대는 녀석의 손을 잡고 다시 원으로 향한다. 다시 잡은 녀석의 손은 역시 참 자그마했고 여전히 따뜻했다.




그다음 주, 치통을 호소하는 유치원생 쏨 (가명)을 데리고 내원했다.

프론트의 간호사는 저번과 다른 사람이었다.

아직 나를 본 적이 없는 그가 카운터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쏨 어머님, 서류 작성 부탁드립니다."


"네!"


이번엔 스스로 다짐해 본다. 오늘은 쪽이 팔리더라도, 끝까지 일일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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