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보다 조금만 더 행복지고 싶은 나
수많은 세월, 어떤 사람은 세상에다 이런 말을 몇 번이고 고백했을 것이다. ‘내 모든 시간의 반은 좋기를!’ 그랬다, 분명 나도 영원히 반만 행복하길 원하고 있는 것처럼. 이는 참 오래된 이야기이고, 모두 원하는 일이었고,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외치고 싶은 말일 듯. 그러나, 어느 때라도, ‘그때의 나’는, 그 어떤 반보다 아주 조금만 더 행복하려고 했다. 물론, 욕심인지 뭔지 모르면서도. 결국, 그 ‘조금 더’가 언제나 그때의 내게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쾅, 쾅! 때마다 다투는 소리. 저 지구촌 쾅 소리는 아무리 멀어도 더 크게, 쉽게, 듣는 요즘 문명이다. 식량이며 에너지 등 확보를 위해 땅 하늘 바다 곳곳 그 ‘쾅’이 멈추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누구든 살 권리가 있지만, 내 권리는 네 것과 다르다. 내 뜻이 맞으니, 내 뜻에 따르라. 아니면, 싸움이다. 지면 아무 소리 말라. 이렇게, 싸우는 동안, 그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서로의 뜻이나 힘은 언제나 팽팽하게 비슷해져 왔다.
조금이나마 더 평등해지기 위해, 너도나도 내 뜻을 키우기 위해 힘을 모은다. 배우고 가르치며 서로 힘을 하나로 모아 그 뜻을 튼튼히 만든다. 회사든 나라든 마찬가지다. 어떤 땐 힘을 보여주고, 또 가리기도 한다. 그렇게, 나도 힘이 있다며, 서로 대등하게 보이려 한다. 잠시일지, 잠시가 몇 번일지 모르지만, 서로 평화롭게 언제나 웃으며 지내길 바라는 것, 이도 자연의 섭리다. 순간, 순간마다, 그렇게 자연은 참 위대하다. 영원히.
누구나, 평화가 영속되길 바라며, 내 힘을 비축한다. 과연 얼마만큼 축적해 두면 좋을까? 필요 이상은 쓸데없는 욕심이겠으나, 어쩌면, 이 질문 자체도 내 욕심의 발로일 듯. 물론, 먼저 앞서 있어야 한다는 욕심이겠지만,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인류가 존재해 오면서, 이 힘이 자연의 그 끝을 향한 문명 발달의 원동력임은 또한 분명하다.
공공의 자리마다, 생명을 담보로 벌이는 싸움은 어떤 이유든 없어져야 한다며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더 안전하고 오래 생존해야 한다는 명분은 싸움을 정당화시켜 준다. 이 싸움은 합법적인 승패가 얽히고 얽히면서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승화되었다. 게임은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다양하게 가르쳐 준다. 계속 생존하려면, 계속 이겨야 한다. 이렇듯, 나는 참 흔한 명언을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게임을 잘하면 과연 행복한 것인가? 그것도 평생? 답은 없다. 그렇지만, ‘인생은 게임이다.’라고 다시 확인하기 전에, 게임이란 말을 ‘컴퓨터 게임’의 한 사례로 가정하고, 그동안 경험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무엇인가 구체적인 대안이 생길 듯싶다.
내가 했던 게임들
작금의 게임은 컴퓨터를 수단으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확인하듯, 해가 바뀔 때마다, 올해야말로 또 다른 첨단 게임 문명의 꽃인 메타버스 원년이라는 뉴스가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이 가상세계의 생활 개념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은 30년 전에 등장한 소설 속의 용어였다. 1960대 상용화된 IBM이니 Cyber니 하는 기업용 대형컴퓨터에 이어, 1980년대 중반부터 생활화가 시작된 개인용 컴퓨터의 영향이었으리라. 그 후,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게임도 함께 성장했다. 그것도 다른 산업보다 먼저.
소년 시절, 동네 골목이나 논두렁이며 동산의 묘지 잔디는 나의 놀이터였다. 자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숨바꼭질, 오징어게임, 말뚝박기, 막대기칼싸움, 활쏘기, 고무딱총쏘기, 가위바위보 등등. 놀이란, 대부분 그렇지만, 승부가 나야 한다. 반드시 이기고 져야 한다. 이렇게 나는 어릴 때부터 이기면 더 좋다는 것을 몸에 새기며 컸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었다.
본격적인 게임은 첫 직장 생활 때 컴퓨터실 곁에 붙어살면서, 교육용 대형컴퓨터 단말기로 게임을 했었다. 몇 년이 지나자 8비트 PC가 등장하고, 곧이어 16비트 PC에 윈도우가 등장했다. 이 PC 시기와 함께 게임방이 도심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PC방 게임기에 동전을 넣어 ‘뿅뿅뿅’ 하며 비행기 격추 게임을 하거나, 자동차 경주 등의 게임을 참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윈도우가 처음 나왔을 때 무료로 제공되었던 테트리스, 오델로, 지뢰찾기, 카드놀이 등의 무료 게임에 잠시 심취했던 적도 있었다.
2000년 전후, 인터넷 시대가 꽃피우면서 게임은 생활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타크래프트나 리니지와 같은 종류의 온라인게임이 등장했고, 텍스트 중심의 채팅프로그램이며 사이월드라는 생활밀착형 게임이 초기 SNS와 결합하며 몇 년 반짝거렸다. 그 반짝임은 초고속 통신망과 함께 본격적인 게임 전성기를 맞이한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게임들
스마트폰이 생활 수단의 하나가 되면서, 게임프로그램에 다국적 생활 앱의 SNS가 융합되면서 양방향 시뮬레이션 게임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물론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등장했고, 두뇌 스포츠로서 세계프로게임선수권이며 여러 종류의 세계 게임 대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바야흐로, 바둑이나 체스처럼, 세계올림픽대회에서 e스포츠라는 정식종목의 하나로 생활형 스포츠가 된 것.
최근, 블록체인 열풍과 함께 코인이 등장했다. 이 코인이 화폐의 가치교환 수단으로 자리매김을 하기 시작하면서 게임산업에 황금의 날개를 달아주기 시작했다. 특히, 지구의 자산이 모두 토큰화되리라는 세계적 추세에 힘입어 대체불가토큰인 NFT가 우후죽숙 발행되면서, G2E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게임을 하며 돈을 번다는 새로운 직업군이 자리를 잡은 것. 아마도 게임의 종류마다 다른 직업으로 분류될 정도다.
설상가상, 내가 현재 게임을 하면서, 내 아바타로 환생해, 나는 나만의 메타버스라는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생활하리라는 상상에 이르렀다. 가히, 그 끝을 모르는 게임의 발달은 건강을 위한 운동과 연동된 체험형 스포츠도 만들어지고 있다. 가히, 생활체육이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하나가 되어가는데, 이도 그냥 크게 해석해 그냥 게임이라 불러도 될 판이다. 이제, 게임은 취미 생활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한 부분으로서 필수가 되어가는 듯. 첨단 문명이 다가올수록, 밥 먹거나 잠자는 것처럼, 남녀노소 하루 생활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경험한 게임의 흐름을 살피며, 게임도 나 개인 삶의 변화 이상으로 발전의 폭이 컸음을 알 수 있었다. 불과 반세기 전에는 땅바닥 중심의 눈에 보이는 팔길이 안의 게임이었다. 이제는 내 게임 점수가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수천 Km씩 오가다니! 아니, 실시간으로 현실과 꿈속 같은 가상세계를 오가는 갖가지 디지털트윈용 게임이 봇물 터지듯 선두다툼을 하고 있다니!
머지않은 미래에는 보이는 모든 벽이 내 모니터가 되어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이렇듯, 게임을 할 수밖에 없이 만드는 다국적기업 광고가 내 오감을 그냥 두지 않을 것. 게임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힘든 그 광고를 눈 깜빡이듯 자연스럽게 시청해야, 먹고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을 듯. 하, 그럴 것 같다, 아니 그렇다, 이즘이면 세상은 진정 내 뜻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 맞다.
이제 ‘인생은 게임이다.’라는 말을 순간마다 해야 할 듯하다. 그냥 즐기며 노는 것이 아닌, 꼭 이겨야 한다는 의미로 느끼면서 말이다. 성취욕이 더 강해지는 일이야, 사회생활을 하면서 서로 주도권 다툼이 먼저일 수밖에 없으니, ‘좋다, 나쁘다’라며 뭐라 이러쿵저러쿵 말할 성질도 못 된다. 특히, 컴퓨터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더욱 구체적인 표현일 뿐.
게임 목표는 끝없는 생존
시시각각, 볼 때마다 달라지는 이 첨단 문명의 세상에서 계속 ‘생존’하기 위해, 대부분 시간을 내 것을 ‘확보’하기 위해, 잠자는 것도 일이라며 쉼 없이 움직여왔다. 그 ‘확보’ 속에는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는 ‘인생 게임’의 절대성이 존재한다. 즉, 지든 이기든 승패가 정해져 있으니, 어떤 방법이라도 승부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게임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절대성이다. 그렇다, 승부 내기가 삶이라 전제한다면,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 사는 일 자체가 게임인 것.
우리 대부분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면서 행복감을 느끼며 산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과 하던 놀이, 학교 다니면서 성적표 받을 때마다 매겨지는 등수며, 대학 입학시험이든 취직이든 먼저 뽑히고 봐야 했으며, 연간 수입이 얼마냐에 따라 매겨지는 사회 인식, 특히 이 사회 인식이 끝을 모르고 수직으로 상승하는 각종 선거전의 승리 등등, 언제나 이겨야만 내 목표를 달성하는 게임의 연속이었다.
개인을 넘어, 집단 차원에서 볼 때, 세계 지도의 국경선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생존을 위한 전쟁이 있었다. 존재하느냐 소멸하느냐 하는 극명한 승부, 절대적 승자의 논리대로 판이 짜지는, 단 하나의 명령만이 존재한다. 그 명령을 내리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앞뒤 모르는 욕망으로 인해, 그러한 욕망의 충돌이 많은 사람을 또 다른 좁은 영역의 게임으로 내몰았다. 그랬다. 욕망의 꼬리에 꼬리가 불어나며, 나도 그 끝자락 꼬리를 밟으려 애쓴다. 내 남은 삶의 꼬리를 보며, 만지작거리고 있어야 뭐 살아있는 느낌을 느끼는 것처럼.
끊임없는 목표 설정이란, 어쩌면, 게임에서 계속 이기기 위함이다. 살아있기에, 내가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기에, 나는 누구인가 확인하고 만지고 싶기에, 질 때마다 이겼던 내 모습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지더라도 다시 이겼었다는 그 맛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이것을 하찮은 욕망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이는 분명 위대한 욕망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누구에게나 알리고 싶은, 나에게는 내 욕망이 내 최고의 영광 아닐까. 물론, 승부를 두고 이기는 것이 ‘옳다 혹은 그르다’라며, 뭐라 뭐라 그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은 결국 변명이 된다.
게임도 인간처럼 진화한다
내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 어느 시대나, 아니 어느 사람이나, 또 나는 큰 굴곡의 산을 넘으며 살아왔고, 계속 미지의 새로운 강을 건너리라. 그 모두, ‘지금 변화의 폭이 가장 크다’고 느끼며 말이다. 그리고, 언제 더 커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으로 우리는 저마다 만반의 대비를 한다. 무작위로 일어날 경우의 수를 예상해 그때마다 대처 방안을 마련하는 것. 그 방안이 구체적일수록, 실행에 옮길 충분한 예산이 배정되는 만큼, 안정감을 가진다. 이렇게 서로 간의 게임 규칙은 정해진다.
게임 규칙이란 생존을 위한 묵계다. 규칙마다 서로 죽이고 살아야 하는 지침에는 약육강식이라는 이름으로 생존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배어있다. 그 규칙은 인간 저마다 욕심 혹은 그 욕망 수치들을 서로 견주어가며, 서로 내게 유리하게 바꾸려 한다. ‘너도나도 현재 위치한 여기까지 그 욕망 수치를 인정하자, 넘게 되면, 서로 협의해 수치를 높이자, 이를 위해 법 만들고, 만든 법도 고치자!’ 이러한 상상의 끝자락마다 법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작금이다.
그렇다. 어느 나라든 조직이든, 또 그 속의 개인이든, 서로 능력껏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확인된 만큼의 힘에 따라, 협의에 따라, 자신들의 분수를 지키며 존재하게 된다. 어떠한 게임이든 서로 지켜야 할 묵계가 있다. 그러나, 이 게임의 묵계는 불규칙적으로 무시되는 경우는 수없이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그 묵계가 무시되었다 해서, 그 잘잘못을 논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꼴이 된다. 생존하기 위해 게을렀다는 말이다. 이는 생존 포기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임은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규칙이 언제나 변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 생각과 그 움직임이 서로 다르니 변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 지식이 고도화되어가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또한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행복해져야 하는, 생존 경쟁의 치열함이 내 DNA에 면면히 이어져 왔고, 나는 내 본능에 따라 충실히 움직이고 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이론도 먼저 상용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하니, 그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이 현실 세계를 뭐라 나무랄 수 있을까. 인간은 새로워져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그 모든 면죄부를 주는 듯하다.
물론, 이렇듯 새로이 변하는 게임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마도 내 몸을 내 뜻대로 거침없는 행동하게 한다. 그 누구와 대등하게 행동함으로써 느껴지는 떳떳함, 그래서 느끼는 나만의 정체성,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새로운 경쟁자와의 새로운 한 판을 위해 또다시 나는 나를 새롭게 행동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은 나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과 교차하면서, 문득문득, 그 새로움의 무게를 내려놓게 한다. 새로움을 다르게 보는 능력이 생기는 일인 것. 이렇게 게임은 인간처럼 진화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게임은 평등을 향해야
나이 한 살 들수록, 내가 사는 일이 게임의 하나라 본다면, 내 게임에는 평등한 세상을 가꾸는 소품들로 꾸며졌으면 좋겠다는 꿈을 자주 꾼다. 어느 나라나, 내 주변 모두 서로는 서로를 향해 자유와 평등을 외친다. 이 때문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지구나 하늘은 그저 자기 모습대로 그대로인데, 나만 무엇인가 다르다고 버둥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훨훨 펼친다. 이도 게임이라며 말이다. 그렇다면, 평생 게임을 하며 살아야 할 것. 게임을 멈추면, 생명체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것?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쓸데없는 줄 알며, 그래도 행복하다며 게임만 하다 쓰러져야 하는가?
어쩌면, 생명 그 자체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죽으나 사나 게임을 하는 이유가 설명될 듯하다. 먼저 태어난 생명이 먼저 존재할 권리를 먼저 가져야 하지 않느냐는 말, 그래 말은 맞다. 이 말은 먼저 내가 기득권이 되었으니, 또한 그냥 태어나고 보니 기득권이 존재했으니, 이렇게 가지게 된 기득권을, 이 힘을 왜 포기하겠느냐는 거다. 그러니, 내가 펼쳐놓은 이 세상 게임판에서 내가 만든 게임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게임을 할 때마다 생기는 부가가치로 나는 더 기득권이 되겠다는 거다. 그렇다면, 생명체 모두는 불평등하게 태어난다는 말인가? 그럴 듯도 하다. 물론, 사람마다 답은 다르다.
게임은 처음부터 승부가 정해져 있다는 말인가? 뻔한 승부를 두고 생존하는 게임을 즐겨야 하는가? 이것이 필연이란 말인가? 많은 혹자는 반문의 꼬리를 달며, 고개 세우기를 반복한다. 반복하며 외친다. 아니다. 분명 우연도 존재한다. 그 많은 경우의 수 몇몇 곳곳에서 높은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기적 같은 운이, 시대적인 운이 따르는 경우가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승부란 절반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자연의 순리니. 인간도 자연의 하나이니 그렇다. 하, 나는 이렇게 내가 게임을 하는 이유를 변명해야 하는가? 누구라도 쉽게 입을 먼저 열지 않으려 하는 것을.
승부를 위해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 아니다. 생명 자체가 소중하니 아닐 것. 지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변명도 허용되어야 하니, 승부만이 전부는 아닐 것. 진정한 승부란 무승부이어야 한다. 이기든 아니든,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아닌, 그래서 게임은 무승부다. 이것이 평등이다. 그냥 자연스러움이다. 누구나 나도 살아있다며, 게임을 하고 있다며, 그래서 느끼는 나만의 고유함이 얼마나 위대한지 외치는 일, 너와 내가 평등하기에 세상 참 살아갈 만하다는 것. 이 얼마나 멋진 자유로움이냐.
그래, 그래, 이러길 바란다. 게임 결과는 원하는 것 반, 아닌 것 반. 그렇게 반에 서로 근접하기를 바란다. 뭔가 반에 못 미친 것 같겠지만, 항상 부족한 듯하겠지만, 결국 아쉬워하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인간 욕심으로 움직이는가? 물론 이도 아니다. 그래, 아니어야 한다. 욕심이 아니라 본능이니까. 아니, 욕심이 본능이니 그렇다. 그러니 여기에 어떠한 왈가왈부도 금물이다. 내 행복의 기준은 여기서 갈린다. 그래, 약간은 부족하게 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이 행복을 느끼기까지 나는 얼마나 아쉬운 그런 나를 두고 바라보며, 얼굴을 쓰다듬으며 웃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인가.
게임에서 잠시 벗어나기
젊었을 때, 나는 기왕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모두 만끽해 보자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 중, ‘나를 낯설게 하기’ ‘나를 새롭게 하기’, 뭐 이런 많은 상상의 시간을 소비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이유로 지난 일들을 무시하는 습성이 배이게 되었다. 이는 과거라는 내 거울에 얼굴을 비춰봐야 하는 ‘인생 선순환’의 걸림돌이 되었고, 새로운 길을 걷는 힘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나는 한 번은 자연과 인간은 대등하다고도 우겼었다. 아니 인간이 자연보다 위대하다고 고집을 피운 적이 있었다. 그 고집으로 승패라는 오랜 고통의 대가를 알게 모르게 치렀다. 세월 좀 지나치며, 어느 시점부터인가, 절반 조금 넘게 이기기를 바랬다. 그리고 점차 그 절반에서 멀어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하늘과 땅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지는 일이 이기는 것이라며, 이렇게라도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이것이 멋진 인생이라며, 세상 다 살아본 것 같은, 나만의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그러나, 참 비겁하다. 승부 내는 일이 싫기에, 지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나는 그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 시도한 것일 뿐. 그렇다면, 멋지게 게임에서 벗어나는 일은? 분명, 계속 이길 수만은 없으니, 누구나 인생 게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가질 것이다. 그 방법이야 모두 다르겠으나, 벗어나기 위한 공통분모가 있다면, 살아있는 순간까지 나 자신과의 승부는 계속된다는 명제일 것. 나 자신과의 승부는 무엇일까? 그래도 무승부일까?
다시 정답은 없지만, 나의 경우, 게임이란 이기고 지는 것보다, 함께 즐긴다는 뜻으로 여기고 싶어졌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은, 이기면 나누어 주고, 지면 주는 것을 받으며, 다시 절반이 되었구나 하며, 함께 웃으면 어떨까. 이것이 게임에서 벗어나는 멋진 방법이 아닐까? 하, 이것은, 잠깐이지만, 영원한 나만을 위한 생각일 뿐일 것. 지금 조금 웃기 위함일 것. 영원한 철부지처럼, 세상 이론을 내 생각에 맞게 바꾸려 한다. 당연히 법도. 그러나, 지금은 이래야 한다.
디지털세상, 그 게임에서도 잠시 벗어나기
게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모든 이론을 나에게 맞춘다는 것.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세상 다 산 듯, 내가 참 건방지다.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비웃기나 하려는 듯, 또한 내가 아니어도, 이론은 존재해 왔고, 또 새로 나타날 것이다. 한때, 인간 평등을 위한 블록체인 이론이 있었는데, 세상을 디지털로 만드는 그 첫 시도로 보이는 화폐를 디지털화폐로 만드는 일이라고 했던, 참 오래된 이야기가 있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계속 생겨날 이론들은, 게임을 하듯, 세상을 ‘디지털’이란 말을 붙여 재편시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오래 ‘디지털’을 머리에 담아 입으로 내뱉다 보면, 참으로 끔찍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컴퓨터를 부리는 인간이 컴퓨터에게 지배받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상상이란 누구나 한 번 이상 해보았을 것이다. 컴퓨터와 인간과의 승부에서 결국 컴퓨터가 이기리라는 것.
그렇다면, 어떤 인간은 먼저 ‘디지털인간’으로 탈바꿈해 갈 것이다. ‘디지털나’의 ‘디지털고향’ 주소는 어디고, ‘디지털거주’ 주소는 무엇이냐 묻고 답할 것. ‘디지털우주’를 떠도는 ‘디지털지구’에서 ‘디지털마음’으로 ‘디지털게임’을 하며, ‘디지털인생’을 살게 될 것. 그 어느 즈음 되면, 아마도 디지털이라는 말을 가상이라든지 허구라든지 가짜라고 불러도 무관할 것. 그때도 행복이란 말이 사용될까?
혹여,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빨리도 가게 하기도 하고, 뭐 그런 세상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지금은, 가능하다면 장난삼아서라도, 그 ‘디지털세상’을 재빨리 다녀오는 일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 잠깐 가서 내가 살았던 지난날보다 재미없다며, 떠들고 다니고 싶어서다. 듣는 사람마다, 진짜 재미없어? 하고 묻고 물어도, 나는, 응 재미없어, ‘네 것, 내 것이 없어서 그래’. 뭐 이렇게라도 대답을 하기 위해서다.
내 게임은 ‘반은 마음, 반은 몸’이 한다
가끔, 시간이란 ‘내 몸에서 나온다.’라고 우긴 적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내게 흐르는 시간은 내 것. 그 내 시간을 만지며, 내 시간을 준, ‘그 나’와의 게임을 하는 일은 참 멋진 일. ‘그 나’와의 승부란 내 마음대로 내 몸이 움직이는 일이다. 그렇게 움직이면, 진정 어떤 게임에서도 이기는 것이라고 또 우긴 적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게임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그 어떠한 게임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끝은 아니지만, 어떤 게임에서든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나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나’는 내 ‘몸과 마음’이 서로 타협하라는 말이었다. 몸은 현실이요, 마음은 꿈에 가까울 것이니 그렇다. 물론, 이도 이론에 가까운 희망일 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반은 마음이고 반은 몸이니, 그래,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버리지 못하니까 그렇다.
몇 년 전, ‘바보와 얌체’라는 시를 쓰며 슬슬 웃어본 때를 떠올려 본다. 잠시 멍청하게 하늘을 쳐다보다가, 다시 읽으며, 더 슬슬 웃어본다. 하하, 참 지금 행복하다. 이 순간만은 내 게임에서 벗어나 있을 터이니.
몸은 참 바보야
자꾸
마음만 닮아가
마음은 몰라라
먼
구름 닮아가고
마음은 얌체야
괜히
몸만 약올리는
(졸시 ‘바보와 얌체’,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