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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시선으로 보는 컨텐츠 기록 - <세계의 주인>

by 김다지


윤가은 감독님의 영화 <세계의 주인>을 봤다.

여기저기서 좋다는 소문들이 들려와 정말 오랜만에 찾은 극장이었고,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관람했다.


세계의 주인1.jpg



예고편도 안 보고 가서 정말 물음표 가득한 상태로 영화를 관람했다.

물음표는 윤가은 감독님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서서히 느낌표가 되어갔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윤가은 감독은 하퍼스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영화가 좋았든 싫었든, 영화관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은 달라져 있다.
2시간 동안 집중적인 대리 경험을 하고 나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미약한 변화라도 생긴다.
아직 삶에서 이를 뛰어넘는 강렬한 체험은 해보지 못했다.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언제나 유효하다"고 말했다.


윤가은 감독님의 인터뷰 내용처럼 영화를 보고 나온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꼭, 아무 정보 없이 보는 걸 추천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의 공식 줄거리는 이렇다.





영화의 줄거리


반장, 모범생, 학교 인싸인 동시에 연애가 가장 큰 관심사인 열여덟 ‘이주인’. 어느 날, 반 친구 ‘수호’가 제안한 서명운동에 전교생이 동참하던 중 오직 ‘주인’만이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며 나 홀로 서명을 거부한다. 어떻게든 설득하려는 ‘수호’와 단호한 ‘주인’의 실랑이가 결국 말싸움으로 번지고, 화가 난 ‘주인’이 아무렇게나 질러버린 한마디가 주변을 혼란에 빠뜨린다. 설상가상, ‘주인’을 추궁하는 익명의 쪽지가 배달되기 시작하는데……. 인싸? 관종? 허언증? 거짓말쟁이? “이주인, 뭐가 진짜 너야?”



하지만, 이건 정말 공식적인 줄거리일 뿐이고 영화는 친족성폭력을 다루고 있다.


내가 느낀 인상깊었던 장면들을 정리하며 영화에 대한 리뷰를 해보자면,


1. 첫 장면이었던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벌이는 농도 짙은 키스씬


첫 장면부터 사실 너무 놀랐다.

타이틀도 뜨지 않은 블랙화면에서부터 시작된 적나라한 키스소리는, 내 얼굴을 찌뿌리게 했다.

근데 그 소리의 주인공들이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었고, 그들의 키스신은 꽤나 길었다.

그 순간 바로, 아 '윤가은 감독은 아이들에게 조명하는 감독이었지.' 싶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 씬이 꼭 필요한 씬이었을까?' 싶다. 잘 모르겠다.

주인공인 '주인'이 친족 성폭행의 피해자지만, 누구나 생각하는 피해자의 모습을 하지 않고 있는 아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짚어주고 싶었을까? 그 아이는 그런 일을 겪었지만 여전히 '성'에는 호기심도 있고 직접 해보고 싶기도 한 평범한 고등학생 아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주인이가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 주인이는 깨발랄하고 꽤나 인싸이며, 해맑고 톡톡 튄다. 감독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면서 따라가다보니 친족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직접적이지 않게 드러났다. 그리고 이 영화는 피해자 다움, 이란 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피해자를 안쓰러워 하는 시선도 있지만, 그들을 함부로 규정지으려고 하는 시선도 있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실은 제대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한 감정이 드는 불편한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그 안에는 언니들이 있다. 친족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서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도우며 각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주인이에게 엄청 중요한 '언니'로 등장하는 고민시 배우가 반가웠다. 시기가 안맞아서 방송을 함께할 순 없었지만, 그녀가 지닌 긍정파워와 무한에너지는 그녀와 미팅을 했던 제작진들이 팀 내에서 매우 높게 평가했었다. 그 뒤로 고민시 배우만 보면 언제나 응원하게 된다.


극중, 고민시 배우도 친족 성폭력의 피해자로 나오는데 재판 씬이 참 인상깊었다.


2. 주인이가 엄마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자동세차장 오열씬


본인이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직접 밝히고 난 주인이는, 엄마의 차를 타고 자동세차장에 간다.


부감으로 찍힌 자동차 씬에선 저게 뭔가 했는데 자동세차장임을 알고나서 바로 직감했다. 주인이가 감정을 해소하는 장소겠구나, 싶었다. 그간 깨발랄하고 장난끼가 많은, 붕붕 떠 있던 주인이가 자동세차장 안에서 세차가 되는 동안, 가슴 안에 맺힌 감정들을 엄마에게 오롯이 쏟아낸다.


"엄마는 알았어야지, 나를 더 살폈어야지."


그렇게 감정을 해소하는 딸을 보던 엄마가 말없이 물을 건네고, 이게 모녀들이 감정을 쏟아내는 루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게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장면은, 누구나 손꼽는 인생씬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아마 2025년의 명장면으로 영화판에서 기억될 거 같다.


텀블러에 독한 술을 따라 계속 홀짝 거리며 취한 채로 삶을 살아가는 엄마,

마술처럼 가족들의 상처와 아픔을 다 없애고 싶어했던 남동생도,

자신의 친동생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에 대한 죄책감으로 산에 숨어 3년간 칩거하며 지내는 아빠도,

친족 성폭력 피해자 당사자와 더불어 그녀의 가족들이 겪는 삶도 보여준다.


다시 한 번 피해자들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3. 주인이에게 도착한 마지막 쪽지씬


난 이 영화가 엔딩씬을 이 씬으로 선택함으로서 진짜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윤가은 감독님에게 박수를 보낸다.


주인이가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임을 밝히면서 주인이에게 도착하는 익명의 쪽지는, 누가 무슨 이유로 주인이에게 보내는 건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은 장치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밋밋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그건 주인이와 같은 일을 겪은 또 다른 피해자가 주인이에게 보내온 쪽지였고. 그 쪽지는 우리 중 누구도 될 수 있다는 암시를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조명한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누구나 될 수 있다는.. 한 마디로 우리 주변의 누군가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혹은 우리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쪽지를 읽는 목소리가 여자에서 남자로 바뀔 때 진짜 소름이 돋았다.

정말 탁월하고 완벽한 엔딩이었다.



감독님의 인터뷰대로 영화를 볼 때와 나올 때의 나는 달라져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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