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고, 내려놓고, 외면하기
깨닫고 싶지 않지만 서글픈 현실, 깨달았으니 방향을 잡는 것
저는 사실 제가 좋아하는 미술을 꼬맹이 시절부터 맘껏 그리고 입시도 그렇게 힘들지 않게 치러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계속 흥미를 가지고 재밌어하는 분야에서 직업으로 디자인을 다루게 된 행운아였죠.
하는 일도 참 재미있고 다니고 싶던 회사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생활이 너무 힘들거나 도망치고 싶은 상황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제가 해외로 떠나올 때쯤 그 당시 저를 지배하는 생각은 '내 회사도 아닌데,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나에게는 뭐가 남나. 이 회사를 위해 해준 일들이 나중에 회사를 나와서도 나에게 쓸모가 있을까? 그 경험들만으로 내가 밥 먹고 살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로자'는 참 서글프다. 한 해 한 해 평가를 받고, 늘 나를 증명해 내야 하고, 월급을 빌미로 내 시간을 차압당하는 느낌. 어쩌면 좁은 시야의 짧은 생각일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반복적으로 드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나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 같은 노력, 더 힘든 노력을 하더라도 나에게 남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일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었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만큼 사업적인 지식도 계획도 없었죠.
아이템만 찾아다니며 언젠가는 하겠지라는 생각만 있었던 시간들.
하지만 높은 싱가포르 물가에 월급이라는 것, 돈에 대해서도 새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에 오기 전, 블로그나 카페에서 보던 학비나 렌트비가 정말 실제 그렇게 지불해야 했고 더 놀라운 건 더 비싼 곳은 수두룩했다는 것이었어요. 더 서글펐던 사실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직업도 있고, 월급쟁이로는 생각도 못하는 금액을 받는 사람도 금융 도시답게 매우 많다는 것이었죠.
외사촌 오빠가 외국계 은행에 다녀서 홍콩에 오랫동안 살고 있다고 전해 들었고(어렸을 때는 자주 만났는데, 어른이 되니 외사촌도 만나는 게 쉽진 않네요) 얼마 전 홍콩 상황 때문에 싱가포르로 이주했어요. 하지만 오빠도 그렇게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다는 걸 한국에서 들을 땐 몰랐죠. 정확히 말하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게 맞는 것 같아요.
저와 남편도 한국에서는 대기업에서 안정적인 생활이었고 다른 직업군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막연히 많이 버는데 수명이 짧다더라 정도로 인식했었죠.
싱가포르는 팬데믹 이후로 홍콩에서도 많이 건너오고 중국에서도 많은 유입이 있어서 렌트비가 상승했어요. 안 그래도 높은 렌트비가 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취업시장도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이 겹치면서 생각이 많아졌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곧 비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 신분, 한국보다는 해고하기 쉬운 고용환경이 정착하기 쉽지 않은 요소들이지요. 한국사람이 한국에서 일해서 돈을 벌 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들이 해외생활에는 존재하지요. 한국에서는 전화 한 통화만으로 1,000원도 손해보지 않을 수 있죠. 어떤 분야든 시스템도 알고 법도 알고 한국에서 통하는 상식도 알고 있으니 내 권리 당당히 요구해서 다 찾아 먹을 수 있죠. 하지만 아직 정착 중인 해외생활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정, 여기만의 법,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여러 난관들에서 금전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디가 더 낫다 더 안 좋다라기 보다 살고 있는 동안 좋은 것은 충분히 누리고 안 좋은 것은 많이 내려놓으면서 적당히 몰라서 못 찾아먹고사는 것이 해외생활인 것 같습니다.
저희 가족은 영주권이 나오기 전에는 정착이 힘들겠지만 비자 내어주고 일단 월급은 나오는 회사를 믿고 아이들에게 언어적인 환경은 제공해 줄 수 있는 싱가포르로 이주를 왔고 개인적으로는 이 나라가 아직까지는 좋습니다.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자연과 덜어낼 수 있는 겨울 옷들, 없어도 남 신경 안 쓰며 아껴가며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잘 버텨나가고 있다 볼 수 있겠네요.
물리적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또한 저 개인에게는 아주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첫해 시스템에서 벗어나 주어진 자유가 어색했지만,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몰랐을 싱가포르에서의 시간들이 저를 더 성장하게 만들었고 한국에 대한 시선과 선입견을 깰 수 있는 기회, 가진 것을 놓는 용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에 끌려가지 않고 내가 시간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이었습니다. 또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내가 알던 상식도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생각보다 월급, 대출 같이 시스템에 한발 벗어나 있다는 것, 해외소득만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한글 쓰기를 잃고 인도나 베트남 친구에 대한 편견 없는 우정을 얻었고요. 생각 머리가 커갈 수 있는 선행학습은 잃었지만 자기 레벨에 맞는 반에 배정되어도 실패가 아니라는, 나를 도와준다는 개념을 가지게 해주는 교육 시스템도 얻었네요.
어제 만난 책 많이 읽고 삶의 통찰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내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향해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현실이 녹녹지 않지만 사는 동안 즐겁게 살아야 하니 나를 괴롭히는 생각은 좀 외면하고 나를 채우는 생각을 가까이하되, 가슴을 열어젖히는 일에 용기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한국에 있던 해외에 있던 가족과 건강하게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올 한 해 잘 마무리해 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