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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준 Jan 09. 2024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이규준




Ⅰ. 서론


이정우는 모든 철학의 목표는 인생과 화해하고, 나아가 존재를 사랑하고, 더욱이 세계와 함께 노니는 것이라고 말했다.(*1) 마찬가지로 철학과 화해하고, 철학을 사랑하고, 철학과 함께 노닐면, 철학이란 무언인가라는 질문에 좀 더 생동적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철학을 정의하는 데 사용한 인생, 존재, 세계라는 단어를 다시금 철학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함으로써 생기는 순환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그의 여러 작품에서 밝혔듯이, 순환성이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유에 내재하는 선이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정직함이기 때문이다.           




Ⅱ. 철학과 화해하기     


1. 고통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라고 말했다. 칸트처럼 이성의 범주가 몇 개인지 헤아리는 일, 이론 물리학자처럼 세계가 몇 차원으로 되어있는지 계산하는 일 따위는 자살에 비한다면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갈릴레이가 지구와 태양 중에 누가 우주의 주인인가 하는 문제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철회한 사건에 대해, 카뮈는 잘한 일이라고 그것은 목숨을 걸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빈정대기까지 한다.

이렇듯 철학은 우선 자살과 같은 고통에 천착하는 학문이다. 누군가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면, 그는 병든 것이라고 말한 프로이트 자신도 그의 개인적 고통으로부터 정신분석학의 핵심 개념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명해냈다. 또한, 석가모니가 그 모든 세속적 영광을 뒤로한 채 출가를 결심한 이유도 삶의 보편적 조건인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함이었다. 철학은 고통의, 고통에 의한, 고통을 위한 학문이다. 강력한 주장일지도 모르지만, 철학은 고통을 재생산한다. 철학에 탐닉하는 자는 고통 받는 자이고, 철학은 그가 원한바 그대로 그에게 고통을 되돌려 준다. 극단적인 예시지만, 장 아메리 같은 작가는 그의 작품을 통해 ‘자살’을 ‘자유죽음’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면서, 자살을 금기시하는 사회에 맞서 자살 선택의 합리성에 대해 역설하기까지 한다. 인생과 그것을 모사한 철학의 악취, 메스꺼움, 흉측함. 이정우는 말한다:

     

고대인들에게 “천지에 준한다”는 것은 곧 하늘-땅과 인간 사이에 간극을 만들지 않음을 뜻했다. ‘산다’는 것, 더 넓게는 ‘존재한다’는 것은 때로는 몹시 힘겹고 두려운 것으로 다가오곤 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도대체 왜 세계가 존재하는가?”, “죽음을 포함해, 세상의 이 모든 고통과 비극의 이유/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을 반추하면서 인간은 삶에 대해, 존재/세계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된다.(*2)

     

여기서 앙심이라는 단어가 제법 중요하다. ‘원한을 품고 앙갚음하려고 벼르는 마음.’ 앙심은 단순한 원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에 행할 복수의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표현이다. 앙심의 대상이 자기 자신의 인생이라면, 따라서 파괴적 결과가 예상되는 상황이라면, 그때 철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한 앙심의 대상이 이번에는-인생과 똑 닮은-철학 그 자체라면, 그때 우리는 현실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도스토옙스키가 [가난한 사람들]을 시작할 때 인용한 글에서 나타나듯이, 작가들은 도대체가 보고 싶지도 않은, 온갖 이상하고 추악한 진실들을 땅에서 파내는 경향이 있다. 도대체 철학은 왜 그 짓을 하는가?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인생 속에서 다시금 고통스러운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인생이랑 화해하기 위해 공부한 철학과 화해하기. 무한 퇴행.

철학을 공부했음에도 삶과 화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삶과 더불어 철학까지 증오하게 되는 사람들이, 놀랍게도 몇몇 존재한다. 그들이 증오하는 게 철학의 진실한 면이 아닌, 그저 피상적인 이미지라 하더라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난해한 철학책을 펼친 후,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머리를 쥐어짜면서, 자기 문해력을 자책하기도 하고, 펜으로 밑줄도 그으면서, 끝끝내 읽어 내려간 이유는, 그 두꺼운 철학책 속에, 무언가 탈출구가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일 터. 하지만, 그들에게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철학의 배신. 철학을 증오할 수밖에.      


2. 용서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오로지 우리 자신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이해해 보고자 시도할 때-원했든 원하지 않았든-용서하게 되듯이, 철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철학은 분명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진리를 알려줄 것처럼 굴더니 뒤로 내빼고, 쉬운 얘기를 일부러 어렵게 하고, 실천을 중요시하면서 실천과 별로 상관없는 추상적인 얘기만 늘어놓고, 행복 대신 고통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런 철학의 괘씸함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고 이해해 보고자 노력한다면, 완전히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철학에는 철학만의 고유한 맥락이 있다. 철학적 진리는 겉으로만 보면 은폐된 것 같다. 진리는 원래 희귀하고, 그렇기에 유혹하며, 유혹을 위해서 비밀스러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앎의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있기에 진리는 사실상 비은폐성을 띤다. 즉, 철학은 우리를 유혹하지만 속이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또한 철학의 주제는 사실 인간 이성이 다루기에는 벅찬 것으로서 최대한 정밀하게 쓰여야 한다. 실천의 영역에서 철학은 늘 목소리를 내왔으며, 지금도 내놓고 있는데, 실생활의 사소한 부분에 관해서 얘기할 때도 있지만, 그 뒤에 숨은 거대한 사냥감을 노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사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슬픔이 아닌 기쁨에 대해 말하는 분야이다.

철학에 대한 숱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철학에 다가설 수 있다. 그 방식은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성적이며, 사실 이성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들뢰즈는 철학, 과학, 예술을 카오스를 덮고 있는 가짜 견해들을 물리치고, 그 견해들의 틈 사이로 카오스를 불러내어, 다시 그 카오스를 일종의 짜임새 있는 두뇌로 변화시키는, 서로 다른 세 가지 방식이라고 설명했다.(*3) 즉, 철학은 카오스라는 괴물을 코스모스라는 거인으로 변모시킨다. 이렇듯 철학의 본성에 대한 하나의 명료한 스케치를 얻고 나면, 우리는 철학의 힘겨움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Ⅲ. 철학을 사랑하기     


에리히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4)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는 만연한 현상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받으려고만 하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애초에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주기만 하는 것이다.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기 위해 주는 것이지만, 운이 좋으면 돌아오기도 하는 것. 이것이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본 성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철학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철학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철학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철학을 통해 나 자신까지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철학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철학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롬은 말한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5)

   

오직 겸손한 사람만이 철학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겸손하다는 것은 저열한 굴복이나 열등의식을 뜻하지 않는다. 철학적 겸손은 철학에 대한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을 가능케 하는 힘찬 실천이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진지하게 철학을 공부-사랑-하고자 한다면, 성숙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은 그저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말만 늘어놓는 짜증 나는 인문학 추종자가 돼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공부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칸트와 헤겔 같은 철학사의 거인을 자기가 남김없이 이해하고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지적 행로는 그리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아마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 하리라.

몇몇 철학자들은 문자 그대로 철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소크라테스나 히파티아 같은 사람들. 철학을 제대로 사랑했기에 철학이 사랑을 되돌려 줬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듯, 철학을 위해 죽은 것이다. 정치적, 종교적 갈등에서 패한 철학자들. 철학은 오직 바깥의 사유이고, 기존 체제를 비판하며, 권력과 싸우기에, 언제나 패배한다. 사랑은 어떤 면에서 보면 위험한 것이며, 철학에 대한 사랑은 특히 더 그러하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며, 더 정확히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무게를 고려할 때 철학에 대한 애정은 가벼운 불장난 같은 것이 아니라, 사활을 건 투쟁인 셈이다.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연 철학을 공부할 자격이 있을까.           




Ⅳ. 철학과 함께 노닐기     


이정우는 말한다:     


철학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삶-생로병사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삶-과 더 나아가 존재, 존재한다는 것과 자신의 간극을 메우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과 화해하기, 더 나아가 그것들을 사랑하기, 함께 노닐기. 사실, 철학의 본질적 문제는 단 하나이다: 어떻게 인생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어떻게 존재/세계와 함께 노닐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감성적인/즉물적인 해결로 만족하거나,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간단한/게으른 결론으로 치닫거나, 외부적인/제도적인 장치들에 내맡기거나 하지 않고, 사유로써 집요하게 길을 찾아갈 때 철학이 성립한다.(*6)

     

철학은 이성을 사용하는 학문이며, 이성으로 비이성마저 열어 밝히는 학문이다. 뮈토스에서 로고스가 탄생한 이래, 수많은 철학자가 이런 작업에 참여해왔다. 그들은 대부분 역사적으로 과거에 속하며, 현존하는 몇몇 철학자들은 자기들 고유의 새로운 철학으로 ‘지금 이곳에서’ 변화한 세계에 맞서 싸운다. 하지만, 뒤샹이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정지돈의 설명을 빌리자면, 미술과 더불어 철학 또한 현재와의 직접적이고 단일한 관계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7) 즉, 지젝이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이는 지젝 혼자만의 전쟁이 아니라 그가 사랑한, 물리적으로 이미 죽어버린, 헤겔, 마르크스, 라캉과 함께 싸우는 것이며, 주디스 버틀러가 성차별에 반대할 때 그는 그가 공부한 과거의 보부아르, 들뢰즈와 연합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다시, 들뢰즈는 68혁명 때 시민을 억압하는 프랑스 정부와 홀로 격돌한 것이 아니라, 철학사에 숨겨져 있던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과 합심해서 혈투를 벌인 것이고, 니체는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쇼펜하우어와 같이 권력화된 플라톤주의가 유럽 사회에 끼치고 있는 악습을 무너트린 것이며, 다시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며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적 간사함을 무찔렀던 것이었다. 이렇듯, 철학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게임이며, 이천오백 년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한 명이 모든 곳에서 혹은 모두가 한곳에서 목소리를 내는 무대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된다. 이 무대는 물론 미래로도 확장되며, 인류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와 고통이 있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항상 소수이며 소수는 어디에나 있고 소수는 사실상 다수이기 때문이다. 사건. 이러한 수많은 시공간의 지도리 속에서, 반짝임들, 플레시들, 낙뢰들 속에서, 우리는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존재/세계와 함께, 마침내 ‘철학’과 함께 노닐 수 있다.




Ⅴ. 결론     


이정우는 말한다:     


철학자들은 이렇게 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를 ‘천인합일’이라 표현했다. “천지에 준한다”는 것은 바로 이 천인합일의 추구를 함축한다. 그것은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함축하는 아픈 간극이 소멸된 경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천지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해, ‘대상’이 아니었다. 무엇인가를 ‘대상화’한다는 것은 이미 주체가 그것을 장악하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천지는 나타남 자체였고, 그 뜻을 기다리고 따라야 할 존재였다.(*8)

     

철학도 인생처럼 고통이지만, 인생을 진실로 이해하려고 하듯이 철학도 진실로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철학의 힘겨움을 용서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듯이 철학을 사랑할 수 있고, 그것은 곧 세계 전체는 물론 나까지도 사랑하는 일이다. 철학은 때로는 위험하며, 생사의 선택을 강요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각자 알아서 답해야 할 것이다. 다만, 철학을 통과하면서 존재로 인한 아픔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면, 철학을 위해 헌신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살아가는 매 순간 혹은 책상에 앉아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는 순간에, 우리는 모든 시대-장소의 철학자들과 마주친다. 우리는 철학의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노닐 수 있다. 마치, 삶과 함께 노닐 듯이. 철학은 존재를 껴안는다. 천인합일. 인합일.




미주


(*1) 이정우, [세계철학사 2](도서출판 길, 2017), 71쪽.

(*2) 같은 책, 같은 곳.

(*3)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윤정임 역(현대미학사, 1999), 289-314쪽.

(*4)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 역(문예출판사, 2019), 75쪽.

(*5) 같은 책, 55쪽.

(*6) 이정우, 앞의 책, 같은 곳.

(*7)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문학과지성사, 2016), 296-297쪽.

(*8) 이정우, 앞의 책,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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