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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Jul 25. 2022

[서평, 리뷰] 포르투갈은 블루다

오르세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포르투갈 인문서

  눈이 시원할 정도로 깊고 세련된 파란색을 두고 강렬하다는 표현을 하진 않는다. 보통 불타오를듯한 선홍색이나 짙은 묵빛의 검은색을 강렬하다고 칭한다. 그러나 매우 인상적인 유물에서 블루가 이렇게 자극적이라 느낀 적이 있다. 바로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복원한 ‘이슈타르의 문’이다. 몇 해 전 EBS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3부작 ‘위대한 바빌론’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바빌론 왕궁은 진한 블루 벽돌과 황금색 사자 장식의 물결로 치장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 내게 블루는 영욕의 애잔함으로 다가서서였는지 [포르투갈은 블루다]라는 책 제목에서 흥미를 느꼈다. 파란 바빌론 왕궁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책 제목에서 바빌론을 떠올렸다면 책을 펼쳐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이라 중얼거렸다. 매끈한 질감에 화사하게 흰색이 도드라진 아트지 560 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책에 아름다운 사진들이 가득한 탓이다. 아줄레주로 장식된 성당,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안개 낀 호카곶 등 한 페이지가 멀다 할 정도로 인상적인 사진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아니, 어쩌면 아름다운 지중해의 나라 포르투갈 자체가 19세기 인상파 작품들을 주로 전시한 오르세 미술관 일지 모른다.  스코틀랜드 사람과 결혼한 대학 후배가 10년 전 즈음에 자기가 여행한 곳 중 포르투갈이 제일 멋지고 정감이 간다면서 은퇴하면 부부가 포르투갈에서 살 거라고 했다. 당시에는 공감이 가긴커녕, 하필 왜 포르투갈이지? 했는데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블루다]는 저자가 10여 년간 포르투갈을 둘러보고 탐구한 결과가 담겨 있다. 그래서 여행기 같기도 하고 역사를 다룬 역사 입문서라고도 할 수 있다. 주요 도시의 문화유산을 다뤘으니 전문 서적까진 아니지만 포르투갈을 처음 경험할 여행객들이 참고할 만한 문화 서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요 지역별로 묶어 풀어낸 11개 스토리를 저자 특유의 시선과 호흡에 맞춰 읽어 내려가면 이 책이 궁극적으로 포르투갈의 과거와 현재를 망라한 인문서적이라 이해하게 된다. 도시와 지역에 따라 역사나 지리, 문화 등 강조하는 바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저자는 포르투갈을 상징하는 5 개의 오브제로 파두, 정어리, 아줄레주, 포트와인, 아프리카를 꼽는다. 이 5 개 오브제를 하나로 엮는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도 영욕과 회한, 그리고 이질과 융합이다. 아마도 저자가 이로부터 포르투갈을 블루라고 칭했을 거라 추측된다.


  오늘날 포르투갈은 국가 부채가 많고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허덕이는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 중 하나다. 그러나 15~16 세기의 200 년 동안은 대항해 시대를 주도했던 해상 왕국의 영광을 누린 유럽 최고 부국이자 강국이었다. 착한 물가, 선량한 눈망울, 밤의 여흥과 맛있는 음식이라는 포르투갈 이미지 뒷면에는 제국의 흥망과 영욕의 세월에서 비롯된 한이 가득 차 있다. 라틴어로 숙명을 뜻하는 파툼에서 파생된 파두는 주로 선원들이 부른 노래에서 유래했는데 노동요가 대개 그러하듯 파두 역시 왠지 처연하다. 파두를 간드러지게 불러 파두의 어머니라 일컬어진 마리아 세바라는 파두처럼 비운의 삶을 살다 갔다. 그녀의 뒤를 이어 ‘검은 돛배’를 노래한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와 21세기 뉴 히로인 마리자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매년 6월 리스본에서 정어리 축제가 벌어진다. 리스본 남쪽에서 48km 떨어진 세투발은 20세기 초 포르투갈 어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어획된 정어리의 상당수가 세투발로 모였다고 한다. 정어리는 대구와 함께 포르투갈인들이 즐기는 생선이다. 정어리 축제는 풍어를 기원하는 축제인 동시에 산투 안토니오를 기리는 행사이다. 아무도 안토니오 수도사의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아 바닷가에서 낙담해있던 그의 푸념을 들어준 게 셀 수 없이 몰려든 정어리 떼였고 그로부터 유명해져 사후 1년 만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 등 푸른 푸른 생선과 서민들의 흥, 역시 블루다.


  블루 하면 포르투갈을 상징하는 짙은 코발트 아줄레주를 빼놓을 수 없다. 켈트어로 달을 뜻하는 신트라는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휴양지이자 별장의 도시이다. 리스본에서 서북쪽으로 24km에 있다. 16세기 마누엘 1세가 그라나다 알함브라궁에 감명 받아 신트라 왕궁에 스페인에서 수입된 타일을 장식했다. 아줄레주는 이로부터 기원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서야 포르투갈에서 자체 제작하였고 17세기 말에 이르러 코발트블루의 아줄레주를 만들 수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포르투갈 제일의 아줄레주 야외 전시장은 포르투이다. 알마스 예배당 아줄레주에서 묘하게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떠오른다. 눈이 시린 블루색이 피오레 성당의 감회색과 다른데도 말이다. 오랜 유적은 모양과 색깔이 달라도 엇비슷한 감흥을 주는가 보다.


  포르투의 도루 강 유역은 경사진 포도밭으로 유명한 포트와인의 산지이다. 비탈진 경사에 촘촘하게 들어선 포도밭은 마치 남해 다랭이 논을 보는 듯하다. 품질이 열악해도 와인은 바다 사내들에게 귀한 술이다. 오랜 항해에 보관이 어렵기 때문이다. 와인이 발효되는 중에 주정을 넣어 발효를 멈추게 하면서 알코올 농도를 높인 와인이 포트 와인이다. 영국이 백년전쟁으로 인해 와인 수입선을 포르투갈로 돌렸는데 항해 거리가 길어져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정을 넣은 데서 탄생했다. 단맛이 보강되고 도수가 높은 포트와인에게서 가족들의 애절한 기다림과 폭풍우에 죽어간 주검의 블루가 느껴진다. 포르투갈은 라거 맥주를 탄생하는데도 크게 일조했다. 라거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맛이 진하고 향이 강한 에일 맥주만 존재했다. 술통에서 누룩이 발효되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막걸리처럼 상면 발효되는 맥주가 에일 스타일이다. 남미 대륙의 효모가 배에 묻어와 독일 바이에른 수도원 맥주에 섞여 하면 발효된 맥주가 라거 스타일이다. 단조롭지만 시원하다. 리스본 산타 루지아 전망대에서 일몰을 보며 슈퍼복과 사그레스를 마시는 맛이 아마 일품일 것이다. 술을 마실 때 음악을 빼놓을 없다. 메자 드 프라드스에서 밤늦은 파두 공연도 제격이겠지만 클래식 또한 어울린다. 나는 라거, 에일, 레드와인, 포트와인을 클래식의 독주, 이중주, 교향곡, 협주곡이라 비유하고 싶다. 솔로로 시원하게 연주하는 독주가 라거요, 깊은 향과 맛이 어우러진 에일은 이중주다. 다채로운 아로마와 여러 풍미가 뒤섞인 레드와인이야말로 교향곡이라면 거기에 주정으로 단맛과 알코올이 보강된 포트와인은 솔로 연주자와 교향악단의 협주에 비유할 만하다.


  페니키아 인이 3천 년 전 리스본에 장착하면서 포르투갈 역사가 시작된다. 로마 시대를 거쳐 이슬람 무어인이 지배했다. 1147년 아폰수 1세가 포르투를 탈환하여 영토를 넓혀나가 1415년 아프리카 세우타를 점령하며 대항해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로마 교황청이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를 지배하고 모로코와 인도 제도 사이의 독점 무역을 허락하여 200년간 세계를 경영했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을 독점하여 1552년 리스본 인구의 10% 이상이 흑인이었을 정도로 대항해 시대와 아프리카, 흑인은 뗄래야 뗄 수 없다. 고향을 떠나 백인들에게 붙잡혀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간 흑인들의 정서에 블루 빼고 무엇이 있을까?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는 필연적으로 쇠퇴와 불행을 예고했다. 엔히크 왕자 이후 바다와 항해를 지배할 수 있었어도 100만 명의 적은 인구로 식민지 네트워크를 영속적으로 경영하기는 사실 불가능하다. 해상 중계무역을 국왕이 독점한 데서 나온 비효율도 무시할 수 없다. 넓은 식민지를 유지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민간의 창의성이 필요한데 왕이 독점할 이윤을 위해 누가 힘을 쓰겠는가? 이슬람 세력에 가로막혔던 비단길이 재개되어 물동량이 줄어든 점도 포르투갈 몰락에 힘을 보탰다. 마침내 1580년 스페인 펠리페 2세에 의해 합병당하고 17 세기에 브라질 등 일부만 빼고 네덜란드에 식민지를 뺏기며 역사의 주인공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영예와 치욕에 블루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저자가 풀어낸 다양한 포르투갈의 인문지식을 따라 읽어도 되지만 독자마다 관심 가는 지역과 도시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다. 저자의 5 개 오브제는 순서에 얽매이지 않아도 11개 스토리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단지 이를 잘 꿰어 한 줄기 블루 목걸이로 묶어 내는 것은 오롯이 독자들의 몫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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