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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Dec 16. 2022

오디오, 와인 그리고 주식

인터넷에서 잃어버린 글을 찾은 반가움

오디오 애호가들에게 실용성 논쟁은 정답이 없을 해묵은 이슈 중 하나입니다. 예전에 자주 들렀던 오디오 사이인 와싸다의 하이파이 게시판에서 이런 유형의 논쟁들 지금도 비일비재합니다. 예를 들면 LP가 낫냐 아니면 CD가 낫냐는 질문 내지는 하이엔드와 빈티지에 대한 논박 등입니다.


2009년 여름에 와싸다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논쟁 실용 논쟁이었습니다. 토론이 격하다 보니 회원 간에 볼썽사나운 댓글이 난무할 지경이었습니다. 보다 못해 중재한다는 취지에서 섣불리 논란에 한 발을 들인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와인을 마시며, 제 직업인 주식 운용을 하는 와중에 그때 글을 다시 봤으면 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서버 관리를 위해 와싸다 사이트가 수차례 서버 증설과 이관을 하는 와중에 2010년 이전 게시글들이 조회가 되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던 차에 우연찮게 오늘 들어가 혹시나 찾아봤는데 당시 글이 복원되어 있더군요. 비록 같이 올린 와인 사진들은 아마도 데이터 관리 때문인지 없어졌지만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일전에 올렸던 와인과 관련해 적은 글 중에서도 언급했었는데요. 기념 삼아 원문을 올려봅니다.


실용, 비실용이란 동전의 앞 뒷면 - 오디오, 와인 그리고 주식 : 2009.7.18


1. 프롤로그
 
 위나라 조비가 왕위에 오른 후 그간 자신의 정적이었던 아우 조식을 죽이려고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 한수를 지어 보라 명합니다. 조식은 일곱 발걸음을 떼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살아남았습니다.
 
 칠보 시 -조식-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네
 콩을 걸러 즙을 만드네
 콩깍지는 가마 밑에서 타는데
 콩은 가마 안에서 우네
 본래 한뿌리에서 나왔거늘
 서로 볶기를 어찌 그리 급한가
 
 한 뿌리에서 난 콩과 콩깍지의 다른 처지를 형제의 상황에 비유한 절묘한 시입니다. 칠보 시와 유사하게 오디오, 와인, 주식은 이처럼 주위 상황과 처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한 뿌리에 났음에도 주관적인 의견이 엇갈리는 분야가 아닌가 합니다.


2. 와인을 마시며...
 
 한 때 해외 헤지펀드 운용사에 근무했을 당시 회식은 항상 프랑스, 이태리 식당에서 와인을 마셨습니다. 당시에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와인이라니.... 막걸리, 소주, 잘해야 생맥주.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의 한복을 입고 위스키에 된장찌개를 먹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회식자리는 정말 불편했고 조금만 마셔도 몸이 풀리고 띵한 와인을 맛있다며 마시는 동료 파트너들을 고상한 척하는 가식적인 이들로 바라봤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찮은 기회에 업계 동료들과 와인을 재밌게 공부하며 마시는 동호회를 결성한 후에야 와인의 묘미를 조금씩 알아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인을 제법 즐길 줄 알게 된 지 만 3년이 되어 갑니다. 특히 건강을 조금 잃은 현재로서는 한두 잔의 와인과 오랜 얘기를 할 수 있는 술자리가 좋아집니다.
 
 와인을 본 격적으로 마신 3년 동안 200병 이상의 와인을 마신 듯합니다. 매달 모이는 와인 동호회, 격월로 열리는 동호회에서 모일 때마다 5병 전후로 따게 되고 개인적으로 집에서 소요하는 양도 있으니까요. 오디오 기기도 급이 있듯이 와인에도 급이 있습니다. 그간 경험한 와인으로 보면 적어도 마니아 급은 아니어도 평범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무통 로췰드, 라피트, 로췰드, 마고, 라투르의 보르도 5대 샤토, 이에 필적하는 슈발블랑, 앙젤뤼스, 부르고뉴로는 다양한 네고시앙의 에세조, 엠마뉴엘 루게의 마을단위 와인, 미국의 대표 와인 오퍼스 원, 칠레의 알마비바, 몬테스 알파 M 등. 한 병에 싸게는 20여 만원, 비싸기로는 병당 100여 만원을 호가하는 와인도 꽤 마셔봤습니다.
 
 <그간 마신 와인 라벨의 일부>
 
 와인에 빠져 들다 보니까 10만 원 전후의 와인은 구입할 때는 성에 차지 않습니다. 이처럼 1만 원의 데일리 와인부터 비싸기로는 100여 만원의 와인을 마셔본 결과 내가 느낀 것은 와인에는 급이 있다는 것이요, 같은 샤토에서 만든 퍼스트라도 빈티지에 따라서 그 맛은 천차만별이요, 가격차이도 크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무통 로췰드는 그간 4~5병을 마셔봤지만 제일 맛있었던 빈티지는 1999년입니다. 그러나 그 빈티지는 다소 빈약한 해여서 무통의 잠재력을 맛보기에는 차라리 2001년 산이 좋았습니다.
 
 <샤토 무통 로췰드>
 
 이렇게만 보면 오디오에 비유할 경우 기기간의 차별성이 크지 않다는 견해는 틀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행복감을 준 와인 중에서.... 한 병에 적게는 60만 원.. 많게는 100여만 원을 호가한 보르도 5대 사토 중 정말로 제 값을 해냈다고 느끼게 한 것은 무통도 아니요, 마고도 아닌 라투르 1999년이었습니다. 5대 샤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던 강건함, 10년을 지나면서 풀리기 시작한 아로마와 다채로운 향, 오랫동안 감흥을 느낄 수 있었던 피니쉬.... 특급 와인이라고 많은 기대를 하고 마셔봤지만 지불한 가치를 해냈다는 와인은 라투르 1999년이 유일합니다.

반면 기대하지 않았던 저가 와인, 5대 샤토가 아닌 와인 중에서 정말로 나와 모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와인을 꼽으라면 다음을 들 수 있습니다.
 
 1위 : 샤토 카농, 빈티지 1975 : 30여 년 동안의 세월을 이겨낸 희귀함, 올드 와인의 진수를 알게 해 준 특이한 경험, 그 세월 동안에 제대로 숙성된 잠재력(20만 원대)
 2위 : 샤토 앙젤뤼스 : 포이약, 마고에만 집중했던 내게 다른 지역의 A급 와인의 잠재력을 알려 주었음, 세컨드의 수준도 괄목할 수준(40만 원대)
 3위 : 데이비드 뒤방 에세조 : 신의 물방울 1권의 DRC처럼 와인을 마시는 순간 꽃밭에 앉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보르도에선 경험하지 못한 우아한 향기(30만 원대)
 4위 : 레엔다 델 토퀴 : 칠레의 중저가 와인, 앙젤뤼스 세컨드와 겨룰 수 있는 강건함, 카숑임에도 불구한 다양한 향기(5만 원대)
 5위 :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 : 미국의 중저가 와인, 2004년 빈티지는 잘 익고, 어느 정도의 강건함도 갖춘 보르도 2급에 필적한 실력(5만 원대)
 6위 : 모스카토 다스티 릴리 : 이태리 발포성 와인, 달콤 새콤한 와인, 여름밤에 무더위를 느낄 때 상쾌함과 시원함을 전해주는 화이트 와인(3만 원)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와 쓰시>
 
 비록 브랜드와 가격으로는 명품이 아니어도 내게 와인의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와인은 약간의 특이함(빈티지), 생소함(테누아르), 그리고 가격에 비해 제대로 만들어진 샤토(인간)의 노력... 그야말로 천지인이 합치될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3~4만 원대에서도 행복을 느낀 반면 100만 원을 소비했건만 후회가 되기도 하는 게 와인입니다. 그러나 100만 원에서 제대로 된 와인을 맛난다면 이것도 행복이겠죠.
다만 잊지말아야 하는 명백한 사실은 100만 원짜리라고 해서 3만 원대의 좋은 와인에 비해 33배 이상의 행복을 주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행복감은 거의 비슷하지 않았나 합니다. 와인을 같이 마셨던 주위 사람들의 추억, 마시며 했던 이야기들... 이런 회상적 요인들에 따라 오히려 행복감이 좌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친구들과 블라인드 테이스팅 한 와인>
 
 이런 내 경험만으로 오디오를 바라본다면 기기간의 차이가 있고, 가격에 따라 품질이 다르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저가의 기기라고 무조건 낮은 등급의 소리를 재현하는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청음자의 오디오적 수준도 중요하지만, 청취환경, 당시의 심리상태 등 다양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다른 기기라도 무차별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요, 같은 기기라도 다르게 들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3.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신 경험이 짧지만 음악을 경험한 것은 더욱 일천합니다. 음악과 관련된 글을 쓸 수 없을 수준입니다. 와싸다에 들어온 시기는 대략 2001년 겨울... 그간 고수분들의 글을 접하며 동경만 해온 초보자입니다. 2002년 광우 에밀레, 크리스 Z-60을 구해서 오디오를 시작하려 했지만 바쁜 직장생활로 인해 1달 만에 되팔고 2007년부터 다시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간은 A/V 시스템으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여태까지 기기로는 마란츠 7001과 빈티지 계열, 스피커로는 모니터 오디오 GS, AR, Z-60을 바꿈질하다가 현재 신세시스 하이브리드 시리즈, 신세시스 폴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와싸다 고수분과 중고품을 거래할 때 많이 놀라기도 했습니다. 2천만 원대의 시디피, 수천만 원대의 앰프와 스피커를 거실 가득히 구비해 놓은 것을 직접 본 것은 정말 잊지 못할 경험입니다. 청음을 할 기회도 얻었습니다. 정말 좋더군요..
 
 왜 이렇게 비싼 빈티지를 고집하느냐의 질문에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파리넬리를 좋은 스피커와 기기에서 가녀린 음색으로 들을 때 팔등의 잔털이 소름 끼치도록 돋는 것을 경험하면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요. 머리를 조용히 후벼 파는 듯이 가녀린 음색이 들릴 때 오디오 감상하는 맛이 제법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불행히도 막귀는 아닐지언정.. 고수분의 시스템과
 내가 애장하는 오디오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분명 다른 것 같기는 해도 내 앰프, 시디피 가격(250만 원, 실구입 기준)에 비해 최소한 5배가 넘는 가격차 만큼 차이를 내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내 오디오 경력이 고작 이 정도여서 실용, 비실용을 논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내 수준에서 논할 수 있는 주장이란 와인처럼 내 심리상태, 청취환경의 제약조건에서 기기간의 차이가 있을 지라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은 기기가 아닌 콘텐츠라는 사실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싫었던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연주가 이제 일에 지쳐 머리가 아플 때 머리를 식혀주는 음악 치료제가 되었고 청계산 매봉 정상 근에서 시디를 파는 아마추어 대금 연주가의 음악이 이생강 선생의 대금소리보다 마음에 와닿니다.


 4. 주식에 대하여
 
 하는 일이 주식 운용이라 항상 주식을 논할 때는 마지막은 항상 밸류에이션으로 귀결됩니다. 나는 주식이 알수록 어려운데 주식처럼 쉬운 게 없는지 다들 스스로가 주식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산을 오르는 등산로 중 어느 하나가 정답이 아니요, 그 등산로를 오르면서 바라본 풍경이 그 산 전체 경치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비록 다른 길로 오르더라도 산 정상에 서는 순간 사방의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인생의 도(道) 또한 어느 하나만이 정답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업계 근무한 지 이제 14년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30대 초반 혈기 왕성할 때 봐왔던 회사에 대한 시각을 다르게 볼 수 있다고 느낀 것은 이제 내가 적어도 산 중턱에 오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도리코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복사기와 프린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가치투자자에게는 대표적인 가치주입니다. 시가총액이 5600억인데 현금만 3400억이 있습니다. 매년 영업이익은 못해도 400억 이상 법니다. 당기순이익으로는 3~400억이 기본입니다. 이런 회사가 영업가치만 2000억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저평가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나도 지금까지 신도리코는 4~5만 원에 사서 1년 반 정도 묵혀두면 항상 50%는 낼 수 있는 종목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신도리코의 좋은 면만 강조하다 보니 본질적인 산업의 속성을 간과한 것입니다. 복사기, 프린터 시장은 내수 포화상태라서 해외에 진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사는 글로벌을 커버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고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다. ODM을 주는 렉스마크는 현재 고전 중입니다. 자체 브랜드를 출시하기 위해서는 위험은 큰 반면 성공확률은 크지 않습니다. 중국 자회사가 상품 매출하는 수준이 본사의 1/2에 달할 정도로 중국의 OEM 가능성은 점증합니다. 쌓아놓은 현금을 의미 없게 소진할 가능성이 크다면 동사의 투하자본 수익률은 8% 이하 수준입니다. 결국 기업의 자본비용을 고려할 경우 매년 돈을 벌어도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미래의 수익은 오히려 (-)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장기투자를 하면 할수록 업사이드 가능성이 점점 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정말 처절하게 쌀 때 사서 6만 원 전후에서 팔아야 하는 주식이 되는 것입니다.


 관점에서 따라서 좋았던 주식이 장기투자를 해선 안 되는 주식으로 바뀝니다. 내게 행복을 주었던 주식이 이젠 불안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5. 에필로그
 
 실용, 비실용을 논하기에는 너무 실력이 안돼서 참견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논쟁의 장에서 인문, 자연과학적 개념과 주제가 거창하게 토론되는 것 또한 종종 지식의 향연처럼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들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 와싸다 게시판을 즐겨 찾는 동호회 분들이라는 점에서 어떨 때는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듭니다.
 
 세상에는 에베레스트도 있고 백두산도 있고 동네 뒷산도 있습니다. 각자 산 정상에 오르면 산의 높이에 따라 세상 풍광의 scope는 다르겠지만 산에 올라 심호흡 한 번 하고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는 다 똑같지 않을까 합니다.


실용, 비실용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입니다. 결론이 나지 않을 주제에 대해서 서로 감정을 상하는 선까지 격정적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상황에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실용적, 비실용적 주관을 갖는다.. 이런 다채로운 경험담을 풀어내는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치 다양한 향과 아로마를 지닌 구하기 힘든 빈티지의 컬트 와인을 좋은 분들과 함께 마시며 즐거운 얘기를 풀어 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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