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양 May 30. 2022

세 번의 여름과 영하의 이르쿠츠크

건기의 우울 



내 몸만한 스쿠터를 끌고 들어오자 켄이 물었다. 괜찮았어?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나는 진이 빠져 바로 대답하진 못했고 스쿠터를 숙소 마당에 세우면서 말했다. 빠이 캐년. 첫 스쿠터 주행을 태국에서, 그것도 빠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하다니. 엄마가 알면 놀라 자빠질 일이다. 스쿠터도 그렇고 가족들은 모르는 은밀한 구석이 꽤 종종 있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특히 여자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정말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그 일들을 하나하나 다 말하지는 않았다. 여행을 할 수록 연락하는 횟수도, 시간도 줄었고 주기도 뜸해졌다. 그리고 엄마는 나의 여행에 대해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첫 스쿠터 주행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웬 시커먼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쿠터를 그리 오래 타지는 않았는데 내 살이 다 타있었다. 잘못하면 살이 벗겨질 것 같아 아껴두었던 팩을 바르고 일찌감찌 침대에 누웠다. 스쿠터를 알려준 언니가 치앙마이로 떠난 후 언니가 지내던 1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2층은 에어컨 바람이 직통으로 날아와서 매일 아침이되면 목이 칼칼했다. 나는 짚라인을 하고 사은품으로 받은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이어폰을 꽂은채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주변이 어두워졌다. 시계를 확인하니 저녁 여섯시였다. 루하리와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루하리는 치앙라이에서 치앙마이로 가는 버스에서 만난 프랑스인인데 얼마전 야시장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내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신기했고 빠이에서 만난 것도 신기했다. 루하리는 자주 가는 팟타이 맛집이 있는데 거기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약속시간이 빠듯해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큰 도로를 지나 야시장 입구가 나왔다. 하나 둘 장사를 시작한 가게들이 불을 켜기 시작했다. 루하리는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팟타이를 주문했다.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빠이에는 언제 온거냐. 언제까지 있을거냐. 루하리는 빠이에서 요가를 한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치앙마이에서도 요가를 하는 것 같았는데, 요가가 취미였구나 싶었다. 여행지에서도 취미 생활을 이어간다는 것이 나로서는 놀라웠다. 나에게는 그런 취미 생활이,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반복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루하리는 프랑스에 돌아가서도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다) 우리는 팟타이를 먹으면서 빠이가 얼마나 치앙마이와 다른지 이야기 했고 오늘 갔던 빠이 캐년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적당한 단어와 문법이 떠오르지 않아 한 문장을 말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하리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고 내일 쯤 빠이 캐년에 간다고도 말했다. 팟타이를 먹고 그 옆에 있는 재즈바에 갔다. 그곳에선 작은 공연이 한창이었고 해먹도 걸려 있었다. 나는 땡모반을 시키고 루하리는 코코넛을 주문했다. 나는 코코넛을 좋아하지 않는데 혹시나 싶어 한 입 먹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 해먹에 누워 흔들거리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건너편에는 루하리의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에게 그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각자 휴대폰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서로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그러다가 챙겨온 책을 꺼내 읽었는데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파리의 우울이라는 보들레르의 시집이었다. 지금의 나의 상태와 전혀 다른 것이어서 그랬을까. 하나도 우울하지 않는데 우울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울에 관한 시집이라니. 그런데 파리의 우울이라는 책에 진짜 '우울'이 나왔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다음날 나는 뱀부 브릿지에 갈 생각으로 스쿠터에 앉았다. 오늘도 뜨거운 하루였다. 빠이 메인 거리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뱀부 브릿지는 말 그대로 대나무로 만든 다리와 작은 강이 있는 여행 명소였다. 사진에서 보이는 그곳은 푸른 들판이 넓게 펼쳐진 자연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의 나는 10km 가 대충 어떤 거리인지 짐작하지도 못했고 얼마나 걸릴 것인지 예측도 해보지 않은채 스쿠터를 밟았다. 빠이 캐년으로 가는 길에서 우측으로 빠지니 황망한 길이 나왔다. 때로는 비포장도로 였고 때로는 험하게 경사진 도로가 계속되었다. 중간중간에 waterfall 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나왔는데 아니 이 더운 태국에 폭포가 진짠가 싶었다. 나는 스쿠터 위에서 폭포로  가고 싶은 호기심을 꾹 누른채 뱀부 브릿지로 향했다. 그런데 뱀부 브릿지는 가도가도 나오지 않았다. 물 웅덩이가 가끔 깜짝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거나 벼락 맞은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구글 지도에서 본 한편의 동화 같은 그곳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저 다치지 않고 도착하기를 바랐다. 길이 너무나도 험했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죽을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만큼 높고 가파른 경사길이 랜덤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뱀부브릿지라고 적힌 이정표가 떡하니 나타났고 고 스쿠터를 주차할 수 있는 큰 공간이 나왔다. 스쿠터에서 내리자 엉덩이가 시큰해져왔다. 꼬리뼈와 엉덩이 뼈가 욱신거렸다. 그런데 여기가 뱀부 브릿지가 맞는가? 사진에서 봤던 것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였다. 여기가 맞아? 나는 휴대폰을 꺼내 구글지도를 쳐다봤지만 뱀부 브릿지가 확실히 여기가 맞았다. 눈 앞에 대나무 다리는 보였는데..... 아니 내말은. 푸르른 잔디와 푸르른 나무와 들판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뱀부 브릿지는 우기에 와야 한다고 적혀있었다. 아... 건기와 우기. 건기의 뱀부 브릿지는 마치 광안대교 없는 광안리, 비양도 없는 협재 해변과 같았다. 나는 순식간에 씁쓸해져 대나무 다리를 끝까지 걸어갔다. 오늘 같은 날은 파리의 우울을 읽어도 괜찮겠다. 아니, 파리의 우울이 아닌 건기의 우울이라는 글을 쓸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 아무것도 없잖아? 


대나무 다리를 한 바퀴 돌고 그제서야 허기가 밀려왔다. 근처에 식당도 안보였고 가장 가까운 카페에서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카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는데, 완전히 자연이 배경인 곳이었고 하늘이 천장인 카페였다. 그점에서는 여기에 온 것이 그렇게 나쁜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파리의 우울 대신 '모순'이라는 책을 꺼내 읽었다. 책 제목이 하필 모순일게 뭐람.  


돌아가는 길에서는 더욱 정신을 가다듬었다. 모르고 온 길은 어찌 왔어도 험학하기 그지 없는 그 길을 알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얼른 이 길을 벗어나고 싶어서 세게 달렸다가 천천히 달렸다가 반복했고 중간에 지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걸리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정도 레벨이라면 이제 스쿠터는 껌이구나 싶었다. 나는 뱀부브릿지에 스쿠터로 다녀온 사람이다! 그것도 스쿠터 2일차만에 ! 

작가의 이전글 세 번의 여름과 영하의 이르쿠츠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