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터의 매운맛
빠이는 낮보다 밤이 활발한 동네였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해가 저물고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뜨기 시작하면 낮의 열기는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낮에 휑하던 거리와 현지인 밖에 보이지 않던 술집엔 국적 불문 유럽인들로 가득했고 가게 입구에는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재즈바에서는 드럼과 기타 소리가 대화 소리를 삼켰다. 나는 숙소에서 알게 된 언니, 동생들과 매일 같이 빠이의 밤거리를 즐겼다.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눈과 귀가 즐거웠고 혼자 있는 한국인이 보이면 같이 놀자고 의자를 내밀었다. 다들 짧은 일정 탓에 멤버가 자주 바뀌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빠이에 더 머물기로 결정을 했다. 숙소 연장을 하겠다고 하니 켄이 묻는다.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언제까지 있을 건데? 글쎄... 나는 대답한다. 그리고 해먹에 누워 있으면 켄의 아버지가 묻는다. 빠이가 왜 좋냐고. 나는 자연이 좋고 한적한 이곳이 좋다고 말하면서 매일 밤 재즈 클럽을 드나드는 이상한 심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냥 치앙마이의 올드타운에 있는 게 나을 텐데..... 역시 사람은 모순 덩어리야. 알고 보니 빠이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것 같았다. 대낮에 걸어서 어디로 이동하기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고 (걸어서 갈 곳도 없지만) 스쿠터로 이동할 수 있는 곳엔 빠이 캐년이나 핫스프링, 카페 같은 곳이 많았다. 빠이 메인 여행자 거리에 질린 나는 스쿠터를 타보기로 결심했다. 아래층 침대에 대전에서 온 언니가 있었는데 내게 스쿠터 타는 법을 알려준다고 했다. "숙소 뒤쪽에 공터가 있더라. 그쪽에서 알려줄게" 언니는 마르고 가늘게 생겼는데 스쿠터 타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나온 것도 나와 비슷하고 유럽으로 가면 순례길을 걷는다는 점도 나와 비슷해서 통하는 게 많았던 언니였다.
스쿠터는 앞과 뒤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뒤에서는 앞사람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풍경을 볼 수도 있었고 등에 기대어 잠을 잘 수도 있었는데 앞자리는 그게 불가능했다. 공터에 도착 후 언니는 내게 앞으로 오라고 했다. 자리만 바뀌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나는 목각 인형이 되었다. 옷자락 대신에 핸들을 꽉 붙잡았다. 손에 땀 안 나기로 유명한데 손바닥이 금세 축축해졌다. 언니는 스쿠터 키를 꽂고 시동을 거는 법부터 차근히 설명을 해주셨다. "내 쪽으로 당기면 속도가 올라가. 조금만 당겨도 올라가니까 천천히 당겨도 돼." 나는 정면을 응시하고 언니의 설명대로 핸들을 꺾었다. 그때 몸이 튕겨져 나갈 것 같은 느낌에 핸들을 놓고 말았다. 스쿠터는 빠른 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언니가 재빨리 다가와 잡아주지 않았다면 부서진 목각인형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우는 소리로 스쿠터 진짜 못 타겠다고 말했고 언니는 할 수 있다고 다시 나를 스쿠터에 앉혔다. 자전거 잘 타면 스쿠터는 껌이라고 말 한 사람 누구야?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겨우 나는 시속 10킬로 직진에 성공했다. 언니는 속력을 더 내야 한다고 했지만 속력을 더 낼 수 없었다. 그냥 걸어 다니고 말지. 스쿠터는 내게 언감생심이었다. "언니 저는 안되나 봐요. 그냥 안 탈래요"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마의 10킬로 구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귀한 시간을 내어주는 것도 고마웠고 답답했을 법도 한데 끝까지 나를 코칭해주려고 노력하는 언니를 보니 힘이 생겼다.
"그럼 딱 다섯 바퀴만 해보고 안되면 포기할래요" 나는 여기가 막다른 길이라고,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하며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았다. 달리는 것에 익숙해지자 속력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이십 키로 삼십 키로, 직진과 커브, 멈춤 그리고 출발을 반복하며 돌고 또 돌았다. 다섯 바퀴가 됐을 때는 언니가 손을 흔들며 이제 돌아오라고 했다. 스쿠터에서 내리는 것까지 완벽 마스터를 하자 긴장했던 몸이 스르륵 풀리고 말았다. 그제야 손가락과 손등, 손목이 저리고 아파오는 걸 느꼈다. 너무 힘을 준 탓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언니가 운전을 하기로 하고 나는 뒤로 가 앉았다. 그때가 누군가의 뒤에 타는 마지막 스쿠터가 되었다.
나는 다음날 바로 스쿠터를 렌탈했다. 하루에 100바트, 한화로 4천 원이 안 되는 돈이었다. (사실 나는 면허가 없었다) 렌탈샵은 면허증 확인도 하지 않고 스쿠터를 빌려주었다. 보증금을 포함하여 총 500 바트를 지불하면 스쿠터를 탈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앙마이, 빠이에서 면허단속도 많이 한다) 나에게도 드디어 스쿠터가 생겼다. 이 스쿠터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나는 여행자 거리를 지나쳐 큰 도로로 나왔다. 예행연습으로 주변을 돌았다. 걸어서 다녔던 길을 삽시간에 지나쳐가니 어딘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시속 50킬로도 무난하게 달릴 수 있었고 속도의 맛을 알아가는 단계였다. 마을을 금방 벗어나니 빠이캐년이 나왔다. 이정표가 가르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달렸다. 시간은 오후 두 시였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공터에 스쿠터를 세우고 입구로 걸어 올라갔다. 좁은 오르막길을 지나자 황토색의 높은 절벽이 보였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만한 너비에 구불구불한 길이 나있었다. 건너갈 수는 있지만 돌아올 수는 없는 길 같아 보였다. 해 질 녘에 오면 분명 멋진 장소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나는 뒤를 돌았다.
주차해둔 스쿠터에 엉덩이를 대자마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안장이 햇빛으로 잔뜩 달구어진 상태였다. 대낮에 아무도 없는 이유를 그제야 깨닫고 앗뜨거를 연발하며 유유히 빠이 캐년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