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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양 Oct 03. 2022

당신에게 비둘기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걸을게요 




매일 길을 걷다 보니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여태 살면서도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특별하게 다르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과 국적 뿐이다. 굳이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친근하게 인식한다. 뭔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 내부의 것들을 보게 된달까. 그러다가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을 때 나이를 묻거나 하는 일이 무엇인지 조심스레 묻는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국적과 생김새만 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순례길에서는 비슷한 속도라면 비슷한 사람들을 계속 마주치게 된다. 속도가 아주 빠르거나, 반대로 느리거나 혹은 한 마을에 연박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오늘도 나는 식당에서, 숙소에서, 바에서, 길 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보냈다. 


우리는 자주 봤을 뿐 뭔가 대단한 것을 나눈 사이는 아니다. 스치는 시간만 쌓여도 정이 생기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하긴 이곳에서는 늘 예측불가의 사건이 벌어지고 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인연이 나타난다. 

길을 걷다 도움을 주거나 받는 일이 생기고, 혼자 식당에 갔다가 합석하는 일이 생기고 길에서 쉴 때 간식을 나누는 등의 사소한 행동이 우리를 단단하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길은 모두 각자의 몫이다. 때로는 혼자 걷고 때로는 모여서 걷는다. 따로 또 같이. 저마다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어제 밥을 먹었어도 오늘 또 같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우린 헤어질 인연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순례길의 매력인 것 같다. 


한 보름 쯤 걸으면 부르고스라는 큰 마을이 나온다. 보통 거기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일정이 짧아 부르고스까지 걷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큰 마을이라 연박하는 사람도 많다. 공립 알베르게에 갔더니 아는 친구들이 꽤 많이 보였다. 피레네 이후에 봤던 사람들이 거의 다 거기에 있었다. 나는 반갑게 인사하고 숙소를 조금 둘러보았다. 어제 같은 숙소에 있었던 커플이 보였고 지난 마을에서 봤던 이탈리아 친구들도 모여 있었다. 그리고 언제인가부터 꼬박 안부를 주고 받는 프랑스 부부가 보였다. 난 그들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comment ca va? 


다소 어색한 발음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돌아오는 것도 역시 불어... 이제 더이상 할 줄 아는 불어가 없기에 영어를 섞어 쓴다. 그리고 구글 번역기를 동원하며 짧은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런데 그 부부들은 여기까지 걷고 다음날 프랑스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짧은 휴가를 내어 이 길을 걸었다고, 다음 휴가 때는 여기서부터 다시 걸을거라고... 열흘 넘게 함께 다니느라 정이 들었던걸까? 아쉬워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부부는 늘 웃는 인상이었는데 그래서 그들로부터 받았던 묘한 긍정적인 기운이 많았다. 그 긍정적인 힘으로 십 키로를 걷고 이십 키로를 걸은 것이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람들의 기운으로 시작하는 하루와 끝. 이제 부부가 없다니. 우리는 비쥬를 나누고 사진을 찍으며 번호를 교환했다. 


"가끔 안부 전해줘" 


부부는 옆옆칸 침대로 돌아갔다. 



조금 잠이 든 것 같았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휴대폰을 보니 세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아차, 소피아와 세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소피아는 토산토스라는 마을에서 처음 알게 된 이탈리아 친구다. 그녀는 숙소 앞 벤치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알베르토. 우리는 다같이 부르고스 성당을 둘러보고 밥도 사먹었다. 해가 길어 저녁 8시가 되어야 어두워졌다. 성당에 다녀온 이후부터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먼저 숙소로 돌아왔다. 온몸이 욱신거렸고 살짝 미열도 느껴졌다. 천천히 숙소 계단을 오르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알고보니 프랑스 아주머니가 내게 손짓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며 내게 걸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흰색 비둘기와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당신에게 비둘기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불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과 점토로 빚은 듯한 작은 비둘기.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본누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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