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 걸을게요
버스는 금방 레온에 도착했다. 걸었으면 일주일은 넘게 걸리는 길인데.... 세시간만에 도착을 해버린 것이다. 현타의 순간이다. 가끔 걷다보면 이런일이 있다. 차로 5분이면 갈 거리를 우리는 몇 시간을 걸려 도착하고 발가락에 잡힌 물집 하나 때문에 하루가 뒤집어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걷는다. 우리가 순례길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뭘까. 매일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 대답이다.
버스에서 내려 히프코 할아버지와 알베르게를 찾아 걸었다. 레온은 부르고스보다 더 큰 도시였다. 구글지도를 보면서 열심히 골목 골목을 지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여기도 첫번째 순례길 때 왔던 곳이었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체크인을 하고 각자 배정 받은 침대로 갔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침대가 텅텅 비어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침낭을 꺼내고 옷가방을 꺼내고 세면도구를 꺼내니 배낭은 텅 비어버려 작아졌다. 옆에는 학생 같아 보이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이 마띠라고 했다. 바르셀로나에 산다고, 오늘은 만실라에서 여기까지 걸었다고 했다. 마띠는 가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길게 땋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짧은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오늘만큼은 뭔가 맛있는 게 먹고 싶어서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레온 성당을 지나치고 광장을 지나치고 내가 도착한 곳은 일본 라멘집이었다. 며칠 전부터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결코 갈리시아 스프로 해소하지 못하는 국물 사랑을 해소하기 위하여. 고추가 두 개 그려져 있는 라멘 하나와 삿포로 생맥주를 주문했다. 뜨거운 국물에 생맥주는 참지 못하지. 주문한 음식이 곧 나왔는데... 어라? 양이 너무 작은거다. 이거 누가 먹다 남은 것도 아니고, 양이 너무 아쉬웠다. 나는 생맥주를 꼴깍꼴깍 들이 삼켰다. 그리고 국물을 맛보았다. 칼칼하고 깔끔한 맛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것 또한 매운건 절대 아니었다. 하긴 외국에서 아무리 매운 음식을 찾아봐도 신라면 맵기의 절반도 안되는걸..... 하지만 거의 보름만에 먹는 동양 음식이 너무나 반가웠다.
배도 채웠겠다 나는 거리 산책에 나섰다. 잘 들리지도 않는 기념품 샵에 가서 키링이나 마그넷 같은 것들을 구경했다. 나도 집에는 산티아고 기념품이 꽤 있지만 새로운 것이 탐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조개 모양의 열쇠고리를 둘러보다가 왠지 히프코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엽서에 편지도 써서 같이 선물하면 어떨까? 이제 각자 출발점이 달라지니 이제 영영 못 보는 인연이니 말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마띠는 없었다. 나는 다이어리에서 엽서를 꺼내 조심스레 써내려갔다. 영어로 써야 하니까 평소보다 더 천천히,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였다. 번역기도 참고해가면서. 엽서는 내가 어느 바에서 샀던 스페인 지도가 그려진 엽서였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전달한다? 얼핏 보니 히프코 할아버지는 다른 쪽 방인 것 같았다. 숙소를 이리저리 들락거렸지만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숙소 관계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남자방으로 할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길게 이어진 문을 두 번 여니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hey, i looking for you'
'oh , you looking for me?'
할아버지 특유의 쩌렁한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퍼졌다. 나는 뒤에 숨기고 있던 엽서와 선물 봉투를 건넸다. 할아버지는 예상치도 못한 선물에 아주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꼬옥 안아주셨다. 이제는 히프코 할아버지를 못볼테니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천천히 내 마음을 전했다. 할아버지는 약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테이블에 약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몇 년 전 심장마비로 쓰러졌었고 스텐트 시술을 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고혈압약과 콜레스테롤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약 꾸러미를 가르키며 늘 건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작별인사를 하고 침대로 돌아왔다. 조금 후 할아버지에게 문자가 왔다.
'이 선물은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열어볼게,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