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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양 Oct 08. 2022

일곱 시간의 스페인

오늘은 여기까지 걸을게요 

오늘은 모처럼 일찍 일어났다. 레온까지 온다고 하루 쉬었으니 이제 다시 길에 올라야 했다. 평소라면 일곱 시에 느긋하게 일어났겠지만 새마음 새뜻으로 움직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이불 대신 침낭을 챙기고 배낭과 등산화를 챙겼다. 공복으로 출발 할 수는 없으니 뭐라도 먹기 위해 2층 키친으로 갔다. 꽃무늬 테이블 보가 깔린 탁자에는 짓무른 서양배와 비스켓, 우유와 커피가 올려져 있었다. '어제 체크인 할 때 간단한 조식이 있댔는데' 탁자 위에는 조도가 낮은 조명이 걸려 있었다. 사람이 서너 명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별 대화 없이 서양배를 가져가 먹고 있었다. 


나는 배낭에서 어제 산 바게트를 꺼냈다. 두 조각으로 자른 후 칼로 옆을 파내어 치즈와 하몽을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하나는 간식용, 나머지는 지금 먹을 것이었다. 바나나와 하나와 스프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후루룩 마셨다. 이른 아침에 마시는 국물은 훌륭한 식사 대용이기도 하고 체온 조절을 하기에도 좋았다. 나는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등산화를 고쳐 신었다. 부르고스에서부터는 계속 샌들로 이동을 했기에 등산화를 신은 것도 꼬박 하루만이었다. 신발의 앞 코와 신발끈은 먼지로 뒤덮여 신발끈을 조일 때마다 손이 흙투성이가 됐다.나는 익숙한 듯이 손을 털고 발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너무 조이지도 않고 또 너무 헐러하지도 않은 딱 중간의 상태가 되야했다.  그동안 길을 걸으면서 물집에 고통 받았기 때문에 신발과 발을 잘 맞춰주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숙소 대문을 나섰다. 히프코 할아버지는 좋은 꿈을 꾸고 계시려나? 





작은 골목을 빠져나와 큰 광장을 가로지르며 화살표를 찾았다. 해가 늦게 지는 대신에 해가 늦게 뜨기 때문에 오전 여섯시에도 캄캄한 밤 같았다. 나는 벽이나 가로등, 전봇대에 표시된 작은 화살표를 찾으면서 레온 시내를 벗어났다. 걸은 지 한 시간 지났을까, 점점 사위가 밝아졌다. 



오늘의 목적지는 오스피탈 데 오브리고라는 마을이다. 레온에서 무려 삼십 일 키로나 떨어진 곳인데 늘 출발 전의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하다. 내가 과연 다 걸을 수 있을까? 너무 과한 욕심이 아닐까? 하지만 산티아고까지 도착하기 위해선 기본 이십 오 키로는 걸어야 했다. 굳이 거기까지 무리하면서 갈 필요는 없었지만 이게 나의 목표였다. 반드시 귀국 전에 산티아고까지 도착하는 것. 



난 평소에 생각이 많은 편인데 걸을 때는 그 생각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반면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도 있는데 그건 잡념에 가깝다고 봐야겠지만 그럴 때는 헤드폰을 끼고 노래를 듣는다. 좋아하는 노래를 무한반복하여 듣기도 하고 랜덤으로 듣기도 한다. 하지만 랜덤도 의미가 없다. 듣고 싶은 노래가 나올 때까지 다음곡 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아무튼 생각을 하던지 노래를 들으며 머리를 비우던지. 둘 다 아니라면 땀을 뻘뻘 흘리며 '내가 왜 여길 왔지?' 흥분하며 걷는다. 그런데 생각보다 머리가 비워지게 되는 순간은 bar에 도착해서 커피 혹은 맥주를 마실 때다.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지칠대로 지친 나는 맥주 한 모금, 콜라 한 잔에 모든 이성을 잃는다. 방금까지 느껴졌던 물집의 고통과 무릎, 발목의 통증은 내가 마시는 액체에 희석되어 휘발된 것만 같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강렬한 태양이 있다. 이 태양이 나를 녹인다.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고 나를 붙잡는다. 정신이 희미해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다. 파란 하늘과 작게 핀 야생화, 나무의 이파리 따위가 생각을 멈추게 만든다. 




'아.. 이런 게 있었지' 







그때부터는 마치 시간이 멈춘듯,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다. 나는 다리의 고통도 잊은 채 그저 자연 속에 있음을 감사하면서 몸을 맡긴다. 





조금 더 이 시간을 만끽하고 싶을 땐 휴대폰을 꺼내 저장해둔 전자책을 읽는다. 여행지에서 읽는 글과 문장은 더 깊이 마음에 달라붙는다. 어떤 문장은 번쩍 정신이 들게하고 어떤 문장은 일어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나는 이런 문장을 좋아한다. 너무 좋아서 더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 책을 덮게 되는 것. 그리고 숨을 한 번 길게 뱉는다. 나에게는 좋은 의미이자 신호다. 좋은 것을 만났다는. 





비행기로 열 시간이 걸리는 먼 나라에 와서 하루에 일곱 시간을 걷는다. 나에게는 하루마다 일곱 시간의 스페인이 주어진 셈인데 앞으로 이렇게 이 주가 지나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때는 단 한 시간의 스페인도, 단 한 시간의 순례길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정직하게 이 길을 걷는다. 내 앞에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아름답다 말하고, 비가 오면 맞고, 힘들면 쉬고, 예쁜 풍경이 나오면 수건을 깔고 앉는다. 시간이 어디로 흐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순간만큼은 영원하다고 믿고 싶다. 내가 이 길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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