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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나 김선자 Sep 02. 2023

알바니아 여행 IV

지로카스터르에서 마지막 날



지로카스터르(Gjirokastër)는 오래된 성과 요새가 있고, 전통가옥이 잘 보존되어 2005년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아름다운 도시다. 오늘은 우리 숙소 바로 뒷골목에 있는 당시 이 지방의 대 유지였던 저택을 방문하기로 했다. 가는 길에는 박물관과 알바니아의 유명한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Ismail¨Kadaré), 그리고 국가 원수이자 알바니아 공산당 창설자였던 엔베르 호자(Enver Hoxha)의 생가도 보인다. 들어가지는 않았다.

구도시 가옥들은 대체로 빈집이 많았고, 그중 반듯하게 개조하거나 수리한 집들은 호텔 및 에어비앤비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원래 살던 주민들은 아래 신도시의 새 건물로 이사를 했거나 떠났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사람의 흔적은 없고 방치된 골목과 집들, 그 허름한 담벼락과 벌어진 포석들 틈에서 이끼와 잡풀이 자라나 한결 유수한 세월의 정취를 풍겼다. 이 아름다운 옛 도시를 천천히 걸으며 향유했다.

우리는 쿨라(kulla)라고 부르는 두 개의 탑 모양의 유달리 높고 위엄스럽게 느껴지는 집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1811~1812년에 지어진 제카테(Zekate) 하우스다. 이 가옥은 전형적 오스만 건축양식에 지역적 요소가 혼합, 가미되어 건축된 대표적인 예로써 이 지방의 권력과 부를 상징하고 의미한다. 이 건물은 알리 파샤(Ali Pasha) 정부에서 활동했던 건축가 제코 (Zeko) 가족이 살았던 집으로, 이후 제코는 알바니아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에 의해 수용되었다가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뒤에야 가족에게 반환되었다. 하지만 이미 거주하기에 너무 열악한 상태의 집은 사립 박물관으로 문을 열어 1973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무화과나무가 가지를 뻗어 무성한 잎으로 담장을 가리고 있었다. 빈 가옥은 비록 세월의 때가 묻어 낡고 허름하나 위풍당당했다. 건축미 또한 멋스러우면서 우아하다. 4층으로 된 건물은 위엄 있고 아주 높은 반면 마당은 넓지 않다. 대체로 생활 자체가 실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집의 하부 영역은 돌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목조 구조물이 세워졌으며, 좌우 두 개의 탑과 같은 날개로 나누어져 정면의 긴 아치들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돔형 높다란 현관문은 마치 성채나 요새를 연상케 했고, 반달모양의 창들과 지붕모서리의 곡선, 지붕 무게를 지탱하는 처마밑의 나무 지줏대, 이 전체적 구조에서 외향상 딱딱함과 답답함을 없애는 동시에 다양성을 주면서도 안정된 느낌으로 장식적인 효과까지 더했다.

매표소 같은 것은 없고, 현관 계단에 죽치고 앉아있던 사람이 다가오면 입장료를 지불하면 된다. 이 나라에서 티켓이나 영수증 같은걸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요구해 봤자 소용없다. 그만큼 사회체계가 조직적이지 못하다는 뜻이며, 아직까지 그 단계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비단 변패가 있을지언정 그럼에도 용케 잘 굴러가고 있었다. 흡사 한국의 80년대 9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관람객은 우리 둘 뿐. 조용해서 천천히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일층과 이층은 겨울나기 위한 공간으로 널따란 입구와 함께 중앙에 커다란 실내 마당 같은 거실을 두었고 왼쪽 큰 방에는 각종 공구와 식량을 보관하는 광, 가운데 맞은편에 우물과 커다란 아궁이가 있다.

실내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삼층 넓은 중앙 거실로 통하여 정면에 앞이 확 트인 실내 테라스가 있다. 여기가 여름철 서재와 더불어 가족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멀고 가깝게 펼쳐진 산맥, 그리고 도시가 안마당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바람이 슬쩍 내 팔을 시원스레 건들며 지나간다.

그리고는 삼면으로 여러 개의 방들이 미로처럼 짜여 있다. 또 어떤 방에서는 다락처럼 4층으로 연결된다. 방마다 벽난로와 붙박이 장이 설치되어 있고, 옆에는 욕실과 작은 공간에 화장실도 있다. 무려 그 시절에 편리를 위해 설치된 위층 화장실들을 보면서 잠깐 그 공법의 능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이 많은 수의 방들을 가늠하면서 꽤 대가족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오른쪽 끝 가장 은밀한 곳에 아름답게 장식된 넓은 거실이 나온다. 바로 예비 신랑신부가 서로 맞선을 보던 곳이다. 당시 중매결혼으로 이어진 두 가문이 한자리에 모여 결혼을 결정하던 일종의 상견례를 위한 접대실이다. 이를테면 예비신부는 뒤쪽 반투명 가름막이 쳐진 높은 복층에서 간접적으로 그 아래의 예비신랑과 그 가족들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옛 우리의 남녀부동석과 같은 무슬림 예식이다. 따라서 이 공간은 신혼부부의 풍성한 후세를 번창케 하는 의미에서 아주 신성시 여겼으며 은밀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신성시 여겼던 장소인만큼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아쉬웠지만, 매우 인상적인 특별한 공간이었다.


정면의 모습
마당에서 본 집의 외향
위층의 실내 테라스
위층의 거실
거실 겸 방
거실 겸 침실의 벽난로
거실과 붙박이 장
화장실
계단 / 붙박이 장 / 맷돌
부엌
실내 수조
요새로 가는 길
정상에 보이는 요새


다음날 산 정상에 있는 성과 요새를 찾았다. 성채는 이 도시의 역사적 산실로써, 아마도 12세기 비잔틴 시대에 형성되어 <은의 성>또는 <은의 마을>로 불리어졌다. 14세기때 에피루스 전제 군의 일부였으며, 이후 1417년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오트만 제국에 정복되어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5세기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이어진 요새가 있다.


성 내부에서 매표소 오른쪽에는 지로카스터르에 살았던 두 역사적 성인의 영묘가 있는 안뜰로 이어지고, 왼쪽으로 알리 파샤(Ali Pacha) 통치 기간에 파낸 <큰 골목>이라는 널따란 갤러리가 연결된다. 갤러리 양쪽으로 1913년부터 1990년대 사이 알바니아 군대가 사용했던 다양한 대포와 함께 화약통 같은 군사장비가 보관되어 있으며, 이차대전 때 독일군 포로수용소로 쓰였던 지하 감옥이 있다. 이 감옥은 엔베르 호자 정권에서 1968년까지 사용되었다. 따라서 알바니아의 오랜 격변기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또 알리 파샤 통치시대에는 이곳까지 물을 끌어오기 위하여 해발 1572미터 소프티 산에서 피라미드 형태로 10킬로미터 길이의 수로가 건설되기도 했단다.

지로카스테르를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 요새와 성채를 찾아 그 안에 진열된 군사 장비들을 보지만, 크게 흥미롭게 느끼지 못한 우리는 갤러리를 대충 훑어본 후 성채를 빠져나왔다. 반면 요새의 성벽에서 바라본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도시가 장관이다. 우리는 성벽에 우두커니 기대어 경치를 탐미하기도 망원경을 꺼내 어디쯤 우리 숙소가 있는지 살피다가 무심코 풀 뜯는 염소 모습에 시선을 막고서는 그 숫자를 헤아리다 하품하며 되돌아 나왔다.


마지막날 아침 가방을 싸고 있는데 남편이 아래층에서 불러 내려갔다. 곁에는 주인아주머니도 계셨다. 그들은 내게 거실 벽 뒤편으로 어두컴컴해서 깊이를 알 수는 없는 거대한 우물을 보여 주었다. 굉장히 크고 넓어 차라리 물 저장소 같았다. 안은 어렴풋하나마 물도 반쯤 차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도 사용되는 물이란다. 이 우물은 전쟁처럼 큰 난리통에 집안에서 피난처로 숨어 지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집은 원래 옆에 있는 문화재의 노란색 집과 연결된 한집이란다. 그리고서 주인아주머니는 옆에 빼놓은 가구를 벽에 갖다 붙여 우물의 입구를 막으신다. 그리고 다시 뺏다가를 반복하면서 그 용도와 설명을 직접 보여주신다. 가구를 벽틈에 갖다 올리자 우물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아담한 거실만 있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잠시 인간이 삶을 지켜내는 능력과 지혜를 엿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흥미를 표하자 매우 흡족하고 뿌듯한 주인아주머니는 이 집의 내력에 대한 깊은 긍지를 느낀다. 이러한 설명과 소통 역시 번역기 앱을 통했다.

남편은 떠나기 전 벽에 걸린 흑백사진에 관심을 가져 카메라에 담았다.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의미가 지난날 어지러웠던 알바니아 격변기의 실상이었다.

마침내 부탁했던 택시가 도착했고, 짧은 여정이나 사람, 집, 도시에 대한 좋은 인상을 담아 주인분과 작별을 고하며 떠나왔다. 택시는 포석이 깔린 중앙도로가 아닌 사잇길로 빠져 달린다. 비로소 쉬운 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정류장에 도착했고 또다시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사란다행 버스는 예정된 시간에 움직이지 않았다. 출발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손님수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하염없이 기다렸다. 사실 이 도시를 찾는 여행객은 자가 또는 렌터카도 있지만 대부분 가이드를 동반한 단체관광객들이다. 이토록 비체계적이고 정보가 미흡한 나라에서 개인별 여행은 솔직이 불가항력의 모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한 시간 넘도록 기다린 끝에 사란다를 향해 출발했고, 버스는 우리가 왔던 도로가 아닌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작은 여러 마을들을 지나면서 손님을 하나 둘 태웠고, 마을이 끊기는 지점에서부터는 산등성을 오른다. 산세는 온통 헐벗은듯한 민둥 바위산으로 거친 듯 고요하고 깊은 듯 열린 느낌을 주어 더욱 아름답다. 길가 꽃들은 오래전 알프스 산맥에서 보았던 것처럼 너무나 선연하고 아름답다. 붉은 자줏빛의 엉겅퀴 그 선명한 꽃송이가 어찌나 크고 기개가 있던지 그 어떠한 꽃도 비견될 수 없었다.

얼마쯤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았는데 갑자기 창밖으로 노랗게 물들인 산등성이를 보았다. 햇살에 비친 그 조요한 모습이 어찌나 작작하고 초연한 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감동과 함께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 다소 멀지만 이 길을 택한 운전기사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서는 이번에 포기했던 코르처 옛 도시를 조만간 꼭 가보리라 다짐했다.


여행은 직관적인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이미지의 깊은 흔적을 새기는 것이다. 그 영향력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 작용이 여행이다.


숙소벽에 걸린 사진들
노란 꽃으로 뒤덮인 산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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