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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나 김선자 Oct 21. 2023

니콜라 드 스탈 Nicolas de Staël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화가



꽤 오래전 일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 그때의 인상이 매우 깊어 아직도 선명하고 또렷하게 기억한다,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 도시 안티브(Antibes)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이다.

거기 전시된 니콜라 드 스탈의 작품 중 크기가 아주 작은 그림에서 그 어떤 대형 작품들보다도 더 광활한 공간을 느꼈다. 큰 세계를 보았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프랑스 곳곳을 지날 때마다 내 앞에 펼쳐진 자연의 풍광에서 당시 보았던 그림을 떠올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 본 추상작품이 그곳에 그대로 전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흡사 니콜라 드 스탈의 작품이군' 추상과 실제 사이에서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그의 예민한 감성까지도 고스란히 전이되는 듯, 심오함에 젖어들기도 했다. 노란 유채꽃 벌판과 녹색, 또는 밝고 연한 갈색의 밀밭, 천연 색종이를 오려 붙여놓은 듯한 이 잠잠한 모습은 바로 그의 작품에서 본 장면이었다. 잿빛의 빈 들판이나 푸르든 희뿌옇든 지평선과 수평선에 바짝 닿은 하늘까지도, 어두운 무채색의 겨울풍경마저도 아름다움을 준다. 단순함과 산뜻함이 느껴진다. 수직, 수평 그리고 지평선과 수평선의 한계를 넘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장철 프랑스의 경광들이 그의 화폭 위에서, 그의 그림이 프랑스 전역에, 입체적으로 또는 추상적으로 전개된 형상이다. 평온한 그림 같은 아름다운 경취, 니콜라 드 스탈의 작품.

그의 그림에는 날렵하고 매끈하게 달아나듯 지나간 나이프 자국과, 하찮은 장식과 단호하게 군더더기 없이 빚어낸, 오직 세련되고 섬세한 색조와 물감이 두껍게 눕고 겹쳐져서 형성된 마띠에르, 그리고 채색된 질감의 놀이와 구성, 면과 면 그 윤곽이 만들어낸 움직임. 그리고 추상과 실제, 구상과 비-구상을 중단 없이 넘나들며, 균형을 새롭게 만들어, 자유롭고 단단한 형태들, 명확한 표현, 행복한 모험적인 톤의 색과 질감, 무한히 까다로운, 뉘앙스, 이 모든 활기를 찾아서 그는 시각, 청각, 촉각의 끊임없는 새로운 감각을 받으며 열정적 광경을 표현한다.


그는 반 고흐의 삶을 닮은, 입체파 화가 브라크와 시인 르네 샤르를 존경한, 그들의 친구이며, 오직 그림을 좋아한, 그림에 충실했던 화가였다.

나에게 있어서 그는 대형작품보다 소품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 무채색이 더 잘 어울리는, 공간의 확장과 팽창, 구성과 마티에르의 놀이, 압축, 농축된 삶으로, 그림에 열정을 불사른,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작가로 느껴진다.




참 오랜만에 그의 회고전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ël) 전, 2003년 퐁피듀 센터가 주최한 이래 20년 만에 파리 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Paris)에서 9월 15일부터 2024년 1월 21까지 그의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한다.

우리는 많은 관람객이 몰려오기 전에 일찍 감치 서둘러 전시를 보기로 했다. 파리에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자주 열리는 전시가 아닌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광고와 입소문을 타고 더 많은 관람객이 밀어닥칠 수도 있으리라는 예측 때문이다.

전시는 1948년 작품을 시작으로 1954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안티브에 있던 작업실에서 그린 그림들까지 연대적으로 대거 전시되었다.

1948-49년 1950년 응축, 1951-52년 풍경, 1953년 작업실에서 병 시리즈, 오케스트라, 1953년 프로방스의 빛, 1953-54년 시칠리아 여행에서 그리고 프로방스 메네르브( Ménerbes), 1954-55년 안티브 작업실에서의 작품과 함께 영원히 완성하지 못할 오케스트라, 큰 배, 갈매기 등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ël), 그는 1913년 생트-페테르부르크(Saint-Pétersbourg)에서 태어나, 1955년 3월 16일 그의 작업실이 있던 프랑스 지중해 연안도시 안티브(Antibes)의 집 건물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41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 출신으로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의 소장이자 부사령관이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백인 러시아인들처럼 그의 가족도 강제 추방되어 폴란드에 정착하지만, 그가 6살 되던 1919년 부모가 사망하면서 그는 뜻밖에 고아가 된다. 그는 1922년 그의 대모로부터 마리나(Marina)와 올가(Olga) 두 자매와 함께 브뤼셀의 프리세로(Fricero) 가문에 맡겨졌다.

브뤼셀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 모로크 등 넓은 세상을 여행하며 그동안 주저하고 지속되던 불투명함을 많이 파괴시켜 나가면서 열정으로 작업을 한다. 그리고 학습적인 작업의 시기에서 빠르게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을 확립함으로써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고, 1942년 어두운 톤이 지배하는 작품에서 새로운 언어의 추상화를 탐구한다. 이후 구상적인 형태를 보이다가 또다시 비-구상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1947년 파리 몽수리(Montsouris) 공원 근처에 정착한 그는 작업실을 마련, 결혼, 그의 예술세계가 거기서부터 기준이 되면서 프랑스 전반으로 펼쳐진다.


"나의 삶은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계속되는 여행이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단단한 내 배를 만들기 위한 이유다" (니콜라 드 스탈)


그는 세잔, 마티스, 반 고흐, 브라크 그리고 람브란트, 페르메이르 등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약 15년 동안 무려 1120점이라는 다작을 남겼고, 작품을 많이 제작했던 만큼 마음에 들지 않은 그림을 수없이 파괴시키기도 한다. 또 그는 자살하기 직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고, 삶을 접기 직전의 작품에서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신경과, 긴장된 표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는 평소 그가 존경했던 브라크(Georges Braque)처럼 라벨이나 유행을 완강히 거절했고, 그림에서 유행 같은 흐름이나 추세를 싫어했으며, 자신을 둘러싼 사물에 대한 생생한 감수성을 개인적이고도 자유롭게 작품으로 그 결과를 만들었다. 그는 종이에 먹, 캔버스 위에 유화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았고, 에티켓(상표) 같은 반복은 불신했다.


여기서 나는 그가 이 짧은 기간에 이토록 많은 작품을 생산함으로써 그의 예민했던 감성이 극에 달하지 않았을까? 그가 스스로 생을 끝낼 만큼 육체와 정신이 심각하게 쇠잔되고 고갈된 상태였지 않았을까? 고 생각했다. 반 고흐처럼... 그리고 그의 이루지 못한 유부녀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부수적으로 전해진다.


그의 그림에서는 유년의 암울하고 냉혹한 환경의 영향 탓인지 자주 어둡고 우울한 색상을 띠기도, 그러나 1953년과 같이 무채색에서 색상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나는 그의 이 시기에 그림들을 제일 좋아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고 생각된다. 특히 1951-53년 작품들, 그것들에서는 주저하거나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이 보다 뚜렷하게 표현되어 나타난다.


1952년 작품들

 

"화가는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항상 그의 눈앞에 감동의 원동력이 있어야 한다" (니콜라 드 스탈)


그는 직접 야외 풍경을 보고 그리기 위해 작업실 밖을 나갔다. 따라서 그의 시각적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고, 240점이라는 풍경작품을 완성한다. 대부분 작은 크기나 중간 크기의 작품들로 일드프랑스, 노르망디, 미디(남불)의 풍경을 담았다.

각 지방과 각각의 장소들에서 그리는 방식과 서로 다른 독특한 인상이 생성되기도, 가령 망뜨-라-졸리(Mantes-la-Jolie)와 쟝띠이(Gentilly)에서는 관찰과 추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도, 르 라방두(le Lavandou)의 해변을 그리면서 남쪽의 경이로운 빛으로부터 새로운 감각을 제공받기도 한다. 노르망디에서는 하늘과 바다의 섬세한 뉘앙스를 번역하고, 더욱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세상의 광경을 구성하는 이 모든 매력을 연장하기 위한 풍경에 도달한다.


1953년 작품, 북쪽에서
1953년 프로방스에서
1953년 작품들, 프로방스에서


"끊임없는 지평선과 함께, 아주 간단한, 낙원" (니콜라 드 스탈)


그는 이처럼 프로방스에서 느낀 그대로를 그림에 나타낸다. 작은 크기의 형태와 모티브 위에서 그림의 즐거움을 다시 연결하여 모든 놀이를 만든다. 남쪽의 밝고 환한 빛의 새로운 모습, 새로운 방식의 작업이 내포된다. 줄지어 선 시프레 나무들의 윤곽, 쟁기질된 밭, 집들의 표면, 지평선 아래 타는듯한 태양을, 또는 바람에 조각된, 빛이 폭발하여 만들어진 붉은 나무, 여기서 그는 세상 더 가까이에서 느끼며 강한 의지만으로 표현하고 작업한다.

 

"나는 끊임없는 안갯속에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메스꺼움을 갖게 하는 이 긴 하루의 풍경에서 그럼에도 나는 움직였다." (니콜라 드 스탈)

 

1953년 8월 그는 가족들과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여행한다. 거기서 그는 펜으로 무너진 고대유적을 그린다.


"나는 모든 바다를 수영하면서 몇몇 크로키 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니콜라 드 스탈)


1954년 크로키 작품, 시칠리아 아그리졍트(Agrigente)에서


"우리는 절대 보이는 대로 또는 보아 믿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우리는 천 개의 진동에서 받은 충격을 그린다" (니콜라 드 스탈)


그림은 삶의 경험에서 다른 메아리처럼 나중에 오는 것이다라고 그가 이미 1951년에 단언했던 것처럼, 그는 이같이 요약된 구성과 대조적인, 그만의 풍경을 창조한다.


1954년 작품들, 메네르브(Ménerbes)에서
1953-54년 작품들, 마르티그(Martigues)에서
1954년 작품, 메네르브(Ménerbes) 에서
베레 연못, 1954년 메네르브에서
분홍 바탕 위에 풍경, 1954년 메네르브에서
밤의 예술의 다리, (Le Pont des Arts la nuit) 1954년, 파리에서
샐러드 그릇, 1954년 안티브에서
함정, 1955년 안티브에서
1955년 안티브에서의 작품들 : 검은 병 / 회색 정물화
1955년, 안티브에서의 작품들 : 항아리 병 / 회색병 / 선반
푸른 바탕의 작업실 구석, 1955년 안티브에서
누워있는 푸른 나체, 1955년, 안티브에서
갈매기, 1955년 안티브에서
전시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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