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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나 김선자 Jan 27. 2024

빅토르 위고의 집

La Maison de Victor Hugo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곳이다. 수없이 이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들어가 볼 생각조차 안 했었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에 비로소 이곳을 떠올렸고, 다음의 우리 문화산책 장소로 지목했었다. 그의 삶에 흔적을 미시적이나마 느낄 수 있는, 빅토르 위고의 집(la maison de Victor Hugo)이다.  

우리는 파리 4구 마레지구의 보주 광장 6번지 (6, place des Vosges, 75004 Paris)로 향했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1802년 2월 26일 브장송에서 태어나 1885년 5월 22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예로움과 함께 1885년 6월 1일 국가 장례식으로 유해를 파리 판테온에 안장했다.

그는 19세기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써, 그의 문학적 위상은 세계적이다. 그는 시인, 극작가, 소설가, 낭만주의 데생 디자이너로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특히나 시와 연극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또한 이데올로기적 역할과 위치를 가진 정치적 인물이자 헌신적인 지식인으로 통한다. 그리하여 생애 후반기에는 확고한 공화주의적 헌신과 더불어 방대한 문학 작품으로 인하여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삶과 작품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매체의 주제가 되기도, 특히 그의 소설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과 <노트담 드 파리, Notre-Dame de Paris> 등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 출판됨은 물론 연극, 오페라, 뮤지컬, 영화로도 연출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빅토르 위고의 집(la Maison de Victor Hugo)은 오늘날의 보주 광장(당시에는 왕실 광장으로 불려졌다) 6층 건물 2층(한국식 3층)에 있다. 3층은 박물관 도서관이다. 이 아파트는 1832년부터 1848년까지 그가 망명을 떠나기 전에 임대해서 살았던 곳이다. 사후에 프랑스 정부가 그를 기리기 위해서,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과 가구, 예술 작품들을 전시하여 그의 삶을 안내하는 방식으로 꾸며 놓았다. 따라서 빅토르 위고가 속했던 삶의 일부와 그의 창작 글들을 함께 떠올릴 수 있다. 

당시 이 아파트는 빅토르 위고의 가족이 떠난 후 다시 임대되었고, 나중에 교실로 변형하는 등 많은 수정과 변화를 겪었다. 또 가구들은 1852년 그의 망명으로 인해 대부분 매각하면서 분산되기도 했었지만, 이후 여러 유품들과 함께 수집되어 재 배치된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 이 아파트의 모습은 당시 빅토르 위고를 목격한 지인들의 회상과 증언, 그리고 박물관에 보관된 기록물이나 문서, 그 외 여러 참고자료를 뒷받침하여 최대한 그때의 이미지와 분위기에 근접하도록 효과적으로 재현, 구성해서 꾸며졌다고 한다. 일부의 불확실성이 있음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루 바닥의 쪽모이 세공을 비롯해 카펫, 가구, 태피스트리 작업과 그림 걸기 등, 당시 이것들을 관리했던 기뇽(Guignon)에 대한 기억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응접실에 관한 증언은 주로 암시적이고 부정확하여, 서로 지지하다가도 때로는 모순되기를 반복했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가구를 비롯한 카펫과 커튼의 문양, 벽지의 색상 등, 그 당시에 유행했던 낭만주의 풍 장식의 화려함은 마치 혼이 나갈 듯이 빠져들게 만든다.  


빅토르 위고의 집은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 10시부터 18시까지 열려있으며, 마지막 입장 시간은 17시 30분이다. 간간이 열리는 특별전을 제외한, 박물관 입장은 무료다. 

출입구는 보주광장을 가운데 두고 사면 건물 아카이드 아래 남동쪽 모서리 즈음에 있다. 입구 검열대를 통과하면 곧바로 왼편 넓고 멋진 고풍스러운 계단이 있다. 거기를 오르면 아파트가 나온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보주광장
아파트로 오르는 계단


이 아파트는 시기와 5개의 주제별로 이어지는 방들로써, 그의 삶 일부를 스케치한다. 나는 이 첫 공간에  발을 내딛자마자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환하게 발하는 노란 겨자색의 그 현란함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방문 오른쪽 거울 앞에 놓인 그의 조각상은 이 공간을 수호하듯 더욱 엄숙하게 만들었다.  

<방 1, 망명 전 대기실>은 노란색 벽지 장식과 함께 꾸며졌다. 이 방은 그가 문학적 성공을 이루기 직전까지의 가족적인 분위기와 그의 젊음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가족 초상화와 친척, 친구들의 사진과 작품들에서 그는 아주 일찍부터 시, 연극, 소설이라는 세 가지 문학 분야에서 뛰어났음을 상기시킨다. 

빅토르 위고는 어린 시절 친구인 아델 푸셔(Adèle Foucher)와 1822년 10월 12일 파리의 생-술피스(Saint-Sulpice)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슬하에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 레오폴드(Léopold)는 고작 몇 달밖에 살지 못했으나, 뒤를 이어 레오폴딘(1824년), 샤를(1826년), 프랑수아-빅터(1828년), 아델(1830년)이 태어났다. 


방 1, 망명 전 대기실
2, 붉은 방: 조각가 다비드 앙제의 작품 위고의 조각상


<2, 붉은 방>, 빨간색 다마스크 천으로 덮인 넓은 거실은 낭만주의 지도자 주변에서 그 당시 문학, 예술, 정치가들과 교류했던 장소의 분위기다. 벽에는 루이 불랑제(Louis Boulanger)의 가족 초상화와 오구스트 드 샤띠롱(Auguste de Châtillon)의 작품이 걸려 있고, 오를레앙 공작과 공작부인이 선물한 이네즈 데 카스트로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도 있다. 이것은 그가 왕족과의 관계와 친분으로 회상되는, 프랑스의 동료가 된, 시인이 획득한 지위를 증언하는 듯하다.

다비드 앙제(David d'Angers)가 조각한 또 다른 빅토르 위고의 대리석 흉상이 보인다. 이 간결하면서도 엄숙하고 강직한 모습은 재료의 고유 질감을 살려서 시인의 성질과 이미지를 잘 표현했음을 느낄 수 있다. 솔직이 소장된 그림은 역사적 문헌으로서의 역할을 할지언정, 작품성으로서 크게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조각상만큼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명성답게 위고의 성향을 제대로 나타낸 작품이다.


<방 3, 망명 중 중국식 거실>, 게르느제(Guernesey, 건지; 프랑스 서쪽에 있는 영국령의 섬)의 망명시대, 이 방과 다음 방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도 그와 함께 유배 기간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제2제정 시대 건지와 제르제(Jersey, 저지; 건지 남쪽의 영국령 섬)에서 거의 20년 동안 추방을 당했다. 그는 제2제정의 가장 큰 반대자 중 한 명이었으며, 7월 군주제와 제2, 제3공화국 하에서 국회의원으로서 공개 토론에 깊이 관여하였고, 평화와 자유를 중시하여 인간의 불행에 민감했던 그는 수많은 사회적 진보를 옹호하고 사형제도에 반대했으며 유럽 통일을 지지했었던 것이다.  

이 방의 장식은 고딕풍 가구와는 분리된, 원래 오뜨빌 II에 있던 4개 방(작은 거실, 침실, 식당 및 작은 침실)에 배포되었던 것으로 빅토르 위고의 정부였던 줄리에뜨 드로에(Juliette Drouet)의 집인 오뜨빌 II(Hauteville II)를 위해 디자인된 장식과 가구였다고 한다. 

이 중국 스타일의 방 패널은 벽을 덮거나 도자기를 위한 선반 장식을 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1863-1864년에 위고가 디자인하고, 그림은 오뜨빌 하우스(Hauteville House) 건설 현장에 고용된 장인 톰 고르(Tom Gore)의 도움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이처럼 시인의 상상력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친밀한 암시와 모노그램이 흩뿌려진 환상과 꿈속에서 펼쳐지는 유머처럼 다가온다. 또한 "장식가"로서 위고의 또 다른 천재성을 보여주는 측면으로 이는 오늘날 이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위고 부인의 화장대와 오뜨빌 하우스 침실의 의자, 4개의 잉크병이 들어 있는 상자가 세트로 완성된다.


방 3, 망명 중 중국식 거실


(방 4, 식당), 이 아파트에 존재하는 고딕 가구에 대한 취향은 줄리에뜨 드루에가 연속적으로 점유한 주택오뜨빌 하우스와 오뜨빌 II로 번성된다. 위고는 줄리엣과 그의 아들들이 종종 함께 오뜨 시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르네상스 가구를 구입하는 동시에, 상자를 구입해 자신의 그림에 따라 원하는 대로 그것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하기도 했다. 따라서 문은 테이블이 되고, 상자는 찬장이나 벤치로 바뀌며, 다리는 기둥이 되어 가구에 고딕 건축물의 모습을 더해주는 디자인적 창조력과 독창성을 발휘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방에서 주목되는 점은 그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인물들, 꼬제뜨(Cosette)와 장 발장(Jean Valjean)이다. 우선 중앙 테이블 위에 전시된 꼬제뜨의 조각상(테라코타)이 시선을 끌었다. 그 역시 소설 속 삽화, 두 손으로 힘겹게 물통을 들고 있는, <레미제라블>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나는 레미제라블을 읽던 그때의 이미지가 어제처럼 또렷하게 느껴져 이 공간이 더욱 친근하고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방 4, 식당: 루이 꽁베르(Louis Convers, 1860-1915)의 작품 꼬제뜨의 조각상(테라코타)
방 5: 작업실에 전시된 입식 책상과 위고의 조각상
로뎅이 조각한 위고의 조각상 / 장 제오프로의 장 발장과 꼬제뜨의 삽화 그림
위고가 그린 데생 작품
위고가 그린 데생 작품


(방 5, 사무실 또는 작업실) 이 작은 규모의 방은 대중에게 잘 보여줄 수 있도록 박물관의 풍부한 컬렉션(그림, 사진, 판화, 원고, 인쇄물 등) 작품과 주제나 시사 성격을 담아 만들어진 전시장이다. 

내가 몇 가지 눈여겨보았던 것은 빅토르 위고가 직접 그렸다는 데생작품이다. 매우 어두운 톤의 삽화, 그의 소설을 연상케 하는, 이 데생들은 여기에 소장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훌륭했다. 새삼 그의 다양한 천부적 재능에 놀랍고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자필 창작물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람에 날리 듯한 글씨체는 그의 머릿속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아이디어를 빠르게 따라잡는 필체다. 더구나 그의 방대한 작품량에서 보여주듯이 그는 앉아서나 서서나 쉴 새 없이 글을 썼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년에 마련한 입식 책상이다. 그리고 그 옆에 로뎅이 조각한 위고의 조각상, 마치 불멸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 외 정치 저술 및 연설, 여행 기록, 메모 및 회고록 모음, 문학 논평, 풍부한 서신, 그리고 거의 4천 점의 그림(대부분 잉크로 작성됨), 디자인 실내 장식과 사진에 공헌한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방 6, 침실), 아파트 안쪽 끝의 이 방은 빅토르 위고가 1885년 5월 22일 죽음을 맞았던 바로 그 침대가 놓여있다. 그는 1881년부터 빅토르 위고 거리로 명칭 된 거리, 130, 델로 길(130, avenue d'Eylau)에서 1878년부터 1885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따라서 이 침대는 거기서 옮겨 온 것이다. 그리고 가구와 그의 79세와 80세 생일을 맞아 프랑스 정부가 제공한 세브르 꽃병과 여러 장의 영안실 초상화가 추가되어 꾸며져 있다. 


방 6, 침실: 위고의 죽음을 함께 했던 침대


아파트의 전체적 규모나 화려함으로 보아 우리는 빅토르 위고의 문학적 위상과 당시 성공한 삶의 모습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방대한 량의 작품을 만들어 낸 그의 문학적 고뇌와 열정 앞에서는 자연스레 엄숙한 존경심과 경외심도 생겨났다. 또한 그의 강한 의지와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부분에서는 부러움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의 여성 편력과 넘치는 정욕 앞에서 범상치 않으면서 범상한 남성, 인간, 빅토르 위고의 모습을 보는 것도 같았다. 50년 동안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여배우 줄리엣 드루에를 포함해 그의 아들의 애인이었던 여배우 알리스 오지(Alice Ozy)까지 다른 많은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프랑스의 관대한 성적 문화가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우리는 빅토르 위고와의 만남을 조용히 남겨두고 층계를 뚜벅뚜벅 내려왔다. 일층에 카페가 있고, 앞으로 마로니에 나무들이 서 있는 길고 아담한 정원이 보인다. 고아한 정취와 함께 쌀쌀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한잔의 커피를 생각나게 했다. 커피를 마시기에 다소 늦은 시간이라는 남편의 염려와 충고에도 불문하고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남편은 따뜻한 쵸코우유를 시킨다. 전통과 현대, 창작과 자연으로 공유된 공간, 이  기분 좋은 싸늘한 공기와 함께 마시는 에스프레소 맛은 일품이었다. 비록 밤잠을 설칠지언정 후회는 없었다. 오후의 즐거운 나들이였다.        


카페와 정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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