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타밀나두 주 마두라이에서 시작
출발에 앞서 긴 준비과정이 필요했었다.
이 여정은 타밀나두 주의 마두라이 시와 탄자부르 시를 거쳐 고아 주의 파나지, 콜라비치, 마가오, 또 카르나타카 주의 후블리 시를 지나 바다미, 파타다칼, 에이홀, 그리고 마지막에 마하라슈트라 주이자 인도 최대도시 뭄바이까지. 그렇게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왕복 항공편에 맞춰, 우리가 가려는 도시를 정하고, 각 도시마다 체류기간을 조정했다. 그리고 총 7군데의 호텔을 예약했다.
호텔이야 다양하게 많지만 막상 찾으려 하면 가성비에 대비하여 조건 좋은 곳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인도의 생활 물가에 비해 호텔비가 결코 싼 것도 아니며, 그나마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원하는 곳을 구하기가 어렵다. 예약은 우선이고, 동시 선불 또는 절반, 후불 결제하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호텔마다 다르다. 또 도착하는 날로부터 최소한 일주일 또는 보름 전에 취소할 경우 환불이 가능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선 지불할 경우 잘 고려해야 한다. 그 하나의 예로써, 작년에 우리가 예약한 후 취소를 했을 때, 환불금을 돌려받느라 꽤나 신경을 곤두세웠던 경험이 있다. 호텔 측에 연락을 하면 '알았다 처리하겠다' 하고서는 늘 감감무소식이었다. 급기야 호텔과 연결되어 있던 부킹닷컴 <booking.com> 측에 연락을 취한 후에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왕복 항공편도 실은 2022년도에 떠나려고 예약했었던 것인데, 죽음에 이르는 시아버지 병환으로 일 년을 꼬박 미루었던 것이다. 결국 추가요금을 더 지불하고서도 날짜를 더 이상 변경, 연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까다로운 부문은 국내에서의 이동 수단이었다. 목적지간 연결되는 교통이 과히 순조롭지 알았다. 처음에는 기차나 렌터카를 이용하려고 했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차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과 함께 매우 힘든 여정이 될 터이고, 렌터카는 또 다른 난감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남편이 들러주었던 인도열차 여행에 관한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 하나를 꺼내본다.
90년대 어느 해, 남편이 먼저 출발해서 여행을 시작하고, 나중에 그의 친구와 타지마할에서 합류하기로 했단다. 당시 친구는 직장에서 꼭 끝내야 할 일이 있어 함께 출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약속장소에 도착한 친구가 빈손으로 걸어오고 있더란다. 좌초지종을 듣고 보니 열차에서 가방을 몽땅 도둑맞았단다. 인도여행이 처음이었던 친구는 태평스럽게도 기차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사이 누군가가 그의 가방을 들고 가 버린 것이다. 다행히도 여권을 비롯한 현금은 안주머니에다 보관했던 관계로 모면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친구의 성향을 떠올리며 파안대소한다. 철학자의 사색이 너무 깊었던 것이다.
남편은 자신 역시도 인도에서 열차를 탈 때는 언제나 가방에 자물쇠를 채우는 것이야 기본이고, 야간열차에서 잠을 청할 때는 항상 노끈으로 가방을 자기 허리에다 묶어놓고 잤단다. 이러한 모습은 기차 안에서 흔히 목격되는 장면으로, 인도인들조차도 그렇게 한단다. 참으로 웃지 못할 모습이지 않은가!
그리고 렌트를 할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운전사와 함께 고용되는 게 기본이었다. 그만큼 인도의 교통과 도로사정이 만만치가 않다는 뜻이다. 도심에는 자동차와 릭샤, 오토바이 등의 차량뿐만 아니라 행인들까지 모두 한데 뒤엉켜서 그 혼잡함의 강도야 이루 말할 수 없고, 끼어들기식 운전과 함께 사방에서 삑삑거리며 달려드는 경적음의 공포는 한마디로 아비규환이다. 거기에다 프랑스나 한국처럼 운전대가 왼쪽이 아닌, 영국이나 일본처럼 오른쪽이라는 점도 하나의 사유였다. 따라서 현지인이 아니면 목숨을 내놓고 운전대를 잡아야 할 정도다. 솔직히 말해 걷기도 힘들었다. 또 시골길은 도로 표시판이나 이정표, 차선조차 거의 보이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므로 자동차만 렌트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있다 해도 운전 적정 나이제한이 있으며, 그 지방의 주 내에서만 이용이 가능했다. 한편 고용된 운전기사는 손님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서 숙식은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다음날 약소장소에서 서로 만나는 식이다.
이처럼 고용된 운전기사의 인건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낮았고, 인력이 넘쳐나는, 인도국민의 소득 수준까지 익히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었다.
이 시스템은 차라리 한 도시에서만 머문다면 오히려 편리한 점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달랐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큰 도시만 있는 것도, 한 지방의 주에서만 머무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만약 자동차 렌트를 한다한들 친절한 운전사를 만난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계속 동행을 해야 하므로 그만큼 불편한 마음과 자유롭지 못한 여행이 될 것도 뻔했다. 애당초 우리의 취지와도 맞지 않았고 취향도 아니었다. 결국 쉽지가 않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바다미 시에서 파타다칼과 에이홀을 돌아오는 노선에서 어쩔 수 없이 하루 일정으로 택시를 탔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남겨둔다.
그리고 특히 고아주의 콜라비치에서 카르나타카 주의 명소 바다미 시로 연결되는 노선이 가장 원활치 못해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은 기차를 타기 위해 두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마가오 시에 내려서 그곳 호텔에 하룻밤 묵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미 시를 빼놓을 수가 없었던 이유는 그만큼의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힌두 석굴사원과 아름다운 석상이 있기 때문이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아름다운 예술품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만한 불편쯤은 충분히 감수하고 잠재워야만 했다.
반면, 교통이 나쁜 만큼 현대문명의 혜택도, 폐단도 덜 받기 때문에 변질이나 혼합된 생활상보다는 더 많은 전통을 간직한다는 장점도 있다. 인도의 깊숙한 시골에서 제대로 된 전통적 삶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힘들게 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우리는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을 출발하여 중간지점인 중동의 작은 섬나라 바레인에서 환승, 인도 뭄바이 공항에 도착하는 걸프항공을 탔다. 이 항공도, 이 노선도 처음 타 본다. 대형은 아니지만, 새 비행기라 생각보다 아주 깨끗하고, 쾌적한 에어프랑스 기종이었다. 특히 기내식단이 아주 맛있었다. 사실 기내식사가 맛있기 힘든데,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중동국가 분위기를 한껏 풍기는 승무원들의 이색적인 차림새에서부터 여행이 벌써 시작된 느낌이었다.
바레인 공항은 아주 현대적이고 깨끗하여 미끄러질 것같이 차가운 내부에서 마치 '오일머니'를 보는 것 같았다. 이용객은 많지 않았고, 한산할 정도였다. 그 가운데 대부분이 인도인이었다. 일간에서 듣기로는 중동의 나라 대부분에 인도 노동자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일반 여행객들이라기보다는 일터를 찾아서, 또는 일터에서 고향으로 가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로 보였다.
방금 착륙했던 비행기에서 내 옆좌석에 앉았던, 바레인에서 열리게 될 자동차 경주에 참석한다는 기술자 팀원 중 한 명인, 젊은 프랑스 남자의 말에 의하면, 주변 중동국가 사람들이 주말마다 바레인으로 몰려든다고 했다. 주말 레저를 즐기려 오는 것이다. 아니래도 이 조그만 섬나라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했던 참이었는데 쉽사리 이해되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오일머니'가 유입되는 나라였다.
우리는 바레인을 경유하여 뭄바이 국제공항에 도착.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시내는 거대했다. 더욱 놀란 것은 공항 주변에 빽빽이 들어선 잿빛의 빈민촌이었다. 공항 담벼락에 바짝 붙어 있다는 점에 놀랐고, 그 범위가 크다는데 또 놀랐다. 반면, 공항내부의 모습은 동양적이고 따뜻했다. 천장에 매달린 연꽃모양의 전등 장식에서 인도이미지가 물씬 풍겨났다.
드디어 인도 땅을 밟았다. 우리는 다시 국내선으로 환승,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 공항에서 잠깐 내린 뒤, 다시 출발하여 마두라이 공항에 닿았다.
따라서 나의 첫 인도 여행은 타밀나두 주 마두라이 시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