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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나 김선자 Apr 06. 2024

인도여행

9. 아라비아해 콜라 만의 콜라비치에서...



파나지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아름다운 콜라 만(Cola Bay)의 콜라 비치로 향했다. 거리상으로는 그다지 멀지 않으나 교통이 나빠 시골의 고물버스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야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예약된 방갈로에 도착했다.

시골버스는 세월을 덮어쓴 기름때와 먼지는 말할 것도 없고 너무 낡아 이미 오래전에 폐차되었음직한데도 굴러간다는 사실과 여전히 쓸모가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엔지소리는 또 어찌나 요란하든지 아무리 노곤해도 잠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편함보다는 영화에서나 보고 경험함직한 물건으로 어느 시대 버스인지 그 출시연차를 맞추는 재미도 솔솔 했다. 예컨대, 여행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맛을 느껴볼 수 있겠는가? 인도인도 아니고, 이곳에 사는 것도 아닌데, 무엇보다 일상이었다면 오만가지 불평불만이 먼저 터져 나오지 않았을까?


방갈로의 공간이 예상보다 넓지 않아 약간은 실망했다. 그렇지만 숲이 감싸 정글에 사는 특별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어느 곳을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고, 땅 위에 높게 솟아 일명 <트리 하우스>라 일컫는 나무 위의 오두막 같았다. 더구나 우리 방갈로는 녹음이 우거진 단지 끝에 있으므로 더 독립적이었다. 이점에 물론 반해서 결정했던 것이다.

아침에는 먼저 깨어난 원숭이 가족이 나무를 타고 깩깩거리며 오르내리는 소리에 우리도 잠에서 깨어났다. 첫날, 이튿날까지도 그들 짓인 줄을 몰랐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비바람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첫날밤 우리는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시퍼런 불기둥이 번쩍번쩍거리더니 순간 굉장히 성난 괴물처럼 천둥번개가 '우르르 꽝꽝' 세상을 부술 듯 한바탕 소동을 피운다. 곧바로 거센 광풍이 밀어닥치자 나무들의 외침과 더불어 폭우가 얇은 지붕 위에 폭포처럼 쏟아진다. 이러다 지붕이 꺼지는 것은 아닌지? 천둥번개가 우리를 삼키거나 나무가 벼락을 맞고 우리를 덮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온몸이 잔뜩 오그라들면서 숨 쉬는 것조차 죽였었다. 남편도 말이 없다. 우리의 말소리, 숨소리가 혹여 더 큰 화를 부를 것만 같았다. 우리의 존재가 너무 보잘것없이 작게 느껴졌다. 진노한 자연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제발! 얼른 지나가기를!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엄청나고 대단한 열대성 폭풍의 위력이었다.

더욱이 낯선 곳에서 첫날밤 처음 겪는 일이라 자연히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고, 상황도, 판단도, 예측도, 불가했다. 그렇게 밤잠을 설치며 긴장의 밤을 보냈던 것이다. 그 탓에 늦잠을 자기도 했지만, 차마 원숭이가 곁에 사는 줄은 몰랐다. 아마 그들도 놀란 나머지 당분간 조신하게 있었지 않았나 싶다.

하늘의 격노가 수그러들면서 잠이 들었고, 젖은 돌계단을 오르는 희미한 발자국 소리에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다. 이어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문을 열었고, “짜이 마시겠어요?" 했을 때, 얼떨결에 ”예“하고  받아 들었다. 그때 배달된 짜이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서비스가 아니라 계산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서는 그 맛도 반감되어 돌아왔다. 기분이라는 양념에 따라 맛이 좌우될 수도 있던 것일까?

사실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방까지 들고 왔으니 당연히 공짜라고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마셨던 것이다. 거기다 도착 첫날밤 그 무시무시한 자연의 노여움까지 겪은 다음이라 격려와 위안의 뜻으로 배달된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어이없게도 순진했던 것이다. 여기가 타밀나두 주도 아니고, 인도의, 고아 주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물가가 비싼 유명 피서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폭풍이 지나간 다음의, 모두가 고요함에 빠져든, 이 상쾌한 아침, 기분 좋게 시원한 공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촉촉하게 스치는 감촉, 눅눅한 방 안의 공기, 테라스에 고인 빗물, 나뒹구는 잔가지와 찢어진 나뭇잎들만이 밤사이의 고해를 증언하듯, 그래서 더욱 따뜻하고 달콤한 한잔의 짜이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때마침 배달된 짜이, 그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우리에게는 바로 중천금 같았던 것이다. 비단 오착 이기는 하나 그 속에 우리 식대로 생각했던 주인장의 마음씀씀이를 꿀처럼 넣었던 것이다.


솔직이 이 방갈로는 우리를 비롯해 내국인보다 프랑스 코르시카 섬에서 살았고, 아직 그곳에 집도 있다던 오스트리아 여성 및  옆 방갈로의 미국인 레즈비언 커플, 젊은 캐나다 남성 등 외국인이 더 많았다. 왜냐하면 독립적이며 조용하다는 점과 특히 식당음식이 인도인보다 서양인의 입맛에 잘 맞았다. 그만큼 맵지가 않다는 뜻이다. 이웃 방갈로에 머물던 미국 남성은 우리 식당을 못 잊어 다시 왔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감탄할 만큼의 맛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곳은 오죽하겠는가?

그 무엇보다 우리 방갈로 젊은 주인장은 뉴질랜드 유학과 네덜란드에서 직장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외국인들의 취향을 잘 살필 줄 알면서도 친절했다. 우리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지역적 특수성이거나 개인적인 성향 또는 사적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위에 말했던 짜이를 비롯해 숙소의 비품들에는 아주 미비하고 빈약한 경향을 보여 샴푸와 비누, 타월은 요청해야 겨우 갖다 주는 식이었다. 특히나 부족한 전기공급 탓에 전기제품사용이 제한되어 에어컨은 물론, 따뜻한 차를 끓일 수 있는 전기포드도, 머리를 말릴 드라이기도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젖은 머리는 그나마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에 겉만 조금 말릴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머리밑에서 곰팡내가 사라지지 않았다. 또 옷가지는 습기를 먹은 채 언제나 축축하게 늘어져 있었다. 숲 속이라 덥지는 않았지만 이 윤습함 때문에 휴식이 아니라 몸이 망가지는 기분이었고, 하는 일도 없는데 아침마다 천근 같은 상태로 일어났다. 파리의 차가운 습도를 피해 왔건만, 이역만리에서 불쾌하고 후덥지근한 공격을 받은 꼴이다. 이 경험은 마치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푸투나 섬으로 회귀한 듯, 그때로 귀환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서 이틀이 지난 후에야 첫날에 주인장이 말했던 "외출 시 문을 잠그고, 아침에 노크소리가 나더라도 놀라지 말라"던 주의사항이 기억났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바로 이웃에 원숭이 가족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침마다 나무 위에서 계곡물 건너 저쪽 나뭇가지로 비행하듯 한달음에 외출을 시작한다. 긴 나뭇가지를 잡고 하늘을 나르는 재주가 예사롭지 않았다. 유연하고도 잽싼 동작은 어찌나 날렵하고 빠른지 내 시선이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길게 나뭇가지처럼 늘어뜨린 어미꼬리를 붙든 새끼 원숭이, 겁먹은 눈동자로 어미 품에 안긴 모습, 흡사 인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나는 그들의 곡예를 지켜보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비록 지린 냄새도 그들의 오물이었음을 알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연 속 그들과 함께 사는 것도 재밌고 신선했다. 


콜라비치 해변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엽서 같다. 서쪽으로 펼쳐진 망망대해, 하늘로 향해 길쭉이 치솟아있는 야자수 나무들, 그 아래 방갈로들, 하얀 백사장, 중간중간 까만 점을 크고 작게 찍어 놓은 듯한 바위들, 그리고 멀리 수평선 따라 아름답게 파이고 솟아난 곶과 만. 천해의 자연. 수채화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풍경과는 반대로 수영을 하려고 바다에 들어갔다가 혼비백산이 되었다. 거센 파도가 순식간에 나를 덮쳐 버렸던 것이다. 나는 썰물처럼 휩쓸러 갔다가 대책 없이 제자리에 곤두박질 내쳐졌다. 고작 몸을 일으키려면 물귀신처럼 자꾸만 잡아당긴다. 수영복은 물살에 의해 다 벗겨질 판이었고, 겨우 움켜잡고 기다시피 나와야 했었다. 코가 찡하고 머리가 아찔했었다. 그렇게 혼이 난 뒤에는 수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겉과 속이 다른 바다는 곳곳에 바위가 숨겨져 혹시라도 그 위에 내동댕이라도 친다면 큰 사고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은 날씨도 궂어서 파도가 잠잠할 날이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바캉스를 온 인도인들도 강 하구에서 바글거리며 물놀이를 즐겼고, 더 웃기는 것은 기껏해야 물이 허벅지밖에 오지 않는 계곡물에 카누를 탄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들의 목적이 카누를 타는 것인지, 사진 찍기 위한 것인지 어쨌든 웃음꽃은 피어났다.

우리는 해변 끝 한적한 방갈로촌의 식당에서 맥주와 감자튀김을 시켜 먹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왜냐하면 조용하면서 전망이 좋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는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이 타고 가는 작은 통나무 배는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적 방식으로 그들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란다. 이 역시 박물관에서나 봄직한 아주 멋진 배다.     

인도의 날씨는 일반적으로 엄청난 비를 동반한 몬순이 6월부터 10월까지라 여행의 최적기는 쾌적한 11월부터 2월 사이다. 하지만 11월의 고아지방 날씨는 아직 몬순이 완전히 떠나지 않고 끝점에 걸쳐있었다. 그리고 3월부터 5월은 기온이 하물며 섭씨 40도, 45도의 매우 덥고 건조한 기온을 나타낸다고 한다.


하루는 콜라비치에서 남쪽 까나꼬나(canacona) 해수욕장을 찾아 버스를 타고 갔다. 혹시 여기서는 수영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수영도 못하고 매일같이 같은 곳에 머물러 있기에 좀이 쑤시고 지겨웠다. 까나꼬나 비치는 높은 유명세만큼이나 굉장히 넓고, 끝없이 길게 펼쳐진 편편한 해수욕장으로 바위도 없어서 수영하기에 안성맞춤으로 보였다. 그러나 야성적이면서도 아기자기 다채로운 콜라비치의 낭만적 운치와는 달리 밋밋한 분위기가 한껏 산업적이다. 하지만 마찬가지 수영 주의경보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기가 아쉬웠던지 남편은 바닷물에 살짝 들어갔다 나왔고 나는 그것마저 귀찮았다. 끈적끈적한 날씨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해수욕장은 경사가 완만해 바닷물이 허리에 닿기까지 족히 몇십 미터 거리 밖에 있어 가방을 둔 채 두 사람이 함께 바다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날은 흐리지만 무더웠고 백사장은 열을 받아 맨발로 걷기가 힘들 정도 뜨거웠다. 결국 조용한 식당을 찾아 시원하게 맥주 한잔으로 더위를 식히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양쪽으로 늘어선 방갈로의 중앙도로를 걸어 하릴없이 끝까지 같다가 되돌아왔다. 오던 길에 야자수 나무 위에서 코코넛을 따는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 같은, 나무를 잘 타는 원주민을 멍청히 바라보는 것으로 까나꼬나 비치에게 '아듀(adieu)'를 했다.

발가락이 샌들에 쓸리어 상처가 생긴 나머지 더 이상 걷기조차 힘들 지경이었고, 택시나 릭샤를 부르려고 해도 그 조차 찾기 어려웠다. 결국은 발을 땅에 질질 그으면서 버스를 타고 콜라비치 숙소로 돌아왔다. 힘겨운 하루였다.

아라비아 해변은 수영도, 쾌적한 휴식도, 모두 내 기대를 저버렸다.

너무 길게만 느껴지던 6일간이었다.


    

시골의 고물버스
우리의 숲속 방갈로
콜라비치
전통방식의 고기잡이 통나무 배
까나꼬나 비치
코코넛을 따는 원주민 / 두 손을 놓은 채 머리에 보따리를 인 원주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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