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추상화가
전시회 마지막 날이다. 결코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이번에 놓치면, 언제 또다시 기회가 찾아올지, 어쩌면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대규모의 개인 특별전은 아무리 세계적인 작가라 해도, 하물며 문화예술도시 파리라 해도 여러 번 계속 열리지 않으므로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볼까 말까 하다. 그러므로 당시에 보지 못하면 다음은 예측할 수 없다. 마르크 로스코 작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보는 것도 처음이다. 그렇다. 자국이나 유럽 작가도 아닌, 거리가 먼 미국작가일 경우엔 더욱 흔치 않다. 그 구체적 연유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전시를 기획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파리에서는 루이뷔통재단 미술관이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 우리 또한 그 문화적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특별전은 한 작가의 작품을 한 공간에다 시대별 두루 펼쳐 놓기 때문에 작품이 전개되는 과정과 그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고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그 작가의 예술세계 전부를 보다 쉽게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진작 보지 않고 이토록 방치하며 미뤄뒀는지는 스스로 생각해도 의아할 뿐이다. 벌써 전시가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났지 않았는가!
아마도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당장 달려가서 볼 정도로 마크 로스코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평소 그의 작품이 나의 발길을 강하게 마구 잡아당긴다거나 그 앞에서 매우 가슴 벅찬 감동으로 흥분되지는 않았다. 닫히고 고정된 구도와 흐리고 희미한 질감은 약간 답답하게 느껴져 크게 울림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물감이 화선지 위에서 서서히 번지는 듯이 잔잔하게 떨리는 진동과 두, 세 가지 겹치는 색의 조화가 은은하고 부드러워 명상적인 평온함을 주기도 하지만 반면, 자욱한 안개나 구름을 연상케 하는 몽롱함, 그래서 가끔은 졸리기도 지루함을 주기도 했었다. 따라서 내게 더 이상의 강렬한 힘과 내적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자극제 역할은 없었다. 이 점은 그의 그림이 나쁘다는 것이 전혀 아니라, 내 기호에 절대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좀 더 가까이서 많은 작품을 직접 보고 싶었다. 어쩜 내가 일부의 작품만 보고서 판단한 것은 아닌지?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동안 내가 가졌던 느낌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도 재 확인하고 싶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전시장을 가려고 마음은 먹었으나 그때마다 뜻하지 않는 일이 생기기도, 사실 한편으론 깜빡 잊고도 있었다. 지난주에는 이주 전 간신히 입장권을 예약해 놓고 나가려던 찰나에 고질병이 찾아와 결국 포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예약을 하려니까 이미 자리는 꽉 차 버렸고, 매우 안타깝지만 완전히 포기상태였는데 뜻밖에도 전시가 하루 연장되었다. 가까스로 우리는 푸낙에서 2유로 비싸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루이뷔통 미술관 사이트에서는 아예 예약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마크 로스코는 미국의 현대 추상화가이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내 예술은 추상화가 아닌, 그것은 살고, 숨을 쉬는 것이다."
그의 본명은 마커스 로트코비치(Marcus Rotkovitch)이며, 1903년 러시아 왕국의 드빈스크(Dvinsk, 오늘날 라트비아의 다우가프필스, Lttonie Daugavpils)에서 유대인 가정에 넷째로 태어났다. 지금의 이름은 1938-39년에 미국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마크 로스코>라 불리기 시작했으나, 1959년까지는 공식화되지 않았다.
그는 장학금을 받고 예일 대학교에 들어갔다가 학위 없이 1923년 가을에 대학을 떠나 뉴욕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한 친구의 도움으로 뉴욕 예술학생연맹의 수업을 들으면서 1930년까지 머문다. 그리고 1928년 그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화가 밀턴 에이버리를 만나 뉴욕에서 첫 단체전에 참여했고, 1929년부터 1952년까지 브루클린 유대인 아카데미 센터에서 아이들에게 데생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1932년 결혼, 1944년에 이혼한다.
로스코는 1933년 대부분 인물화로 뉴욕의 현대미술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34-35년 예술적 보수주의 경향을 반대하는 그룹전에 참가하면서 여러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1940년까지 인간을 주제로 하여 구상작품을 펼친다. 이때에 지하철, 초상화, 누드, 익명의 사람들 같은 도시의 장면들을 재현했었다. 그는 형태를 점점 더 요약하여 단순화시키는 시도와 인물 재현의 한계까지 형태들을 개선, 실현해 나간다. 특히 그의 표현주의적 흔적은 그가 특별히 존경했던 밀턴 에이버리와 마티스의 영향을 받아 변천한다.
나는 아미 그의 작품이 이때부터 희미하고 흐릿한 톤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930년 후반 그는 "훼손 없이" 인물화의 재현은 실패라고 평가하여 구상화를 포기하면서, 잠시 그림을 중단하고 그림에 있어 비전에 대한 이론적 텍스트를 쓰는 데 전념했다. 이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던 원고를 사후에 발견하여 <예술가들의 현실, The Artist's Reality>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40년대 초 로스코는 그림을 재개하였고, 친구들과 함께 "현대 신화"를 도입하려고 연구한다. 그는 고대 신화와 특정한 토템 형태를 바탕으로 야만성에 대응한 보편적인 언어를 개발, 시도하면서 그 어휘는 초현실적이며, 생물형적 요소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뉴욕의 "환상적인 예술, 다다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친숙해진다. 따라서 1945년 페기 구겐하임 갤러리에서 <미국에서 20개 그림의 첫 번째 전시회>를 개최할 때 초현실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나는 미처 그가 이러한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생각조차 못했는데, 여기 그의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이 한 방을 메우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의 구상화와 초현실적 작품을 보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내 마음에 벅찬 감동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1946년 말, 로스코는 멀티폼(Multiformes)과 함께 점점 더 창의적이고 추상적인 단계로 나아간다. 첫 번째 구성이 밀도 있고 체계적으로 유지된다면, 1948년부터는 확장되는 수직 형태와 더 얇은 층들, 더 한정된 구조가 특징적이다. 1949년 초에는 반투명의 밝은 팔레트에서, 겹쳐진 직사각형으로부터의 특성을 나타내는 구성, 얕고 미세하게 희석된 색의 넓고 평평한 영역으로 특징된다. 그리고서 작품들에 번호를 매기기 위해 묘사되는 제목뿐만 아니라 액자까지도 포기한다.
그리고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미국의 현대 조각, 수채화 그리고 드로잉> 정기 전시회 때 그의 미래의 아내 메리 앨리스 베이슬(Mary Alice Beistle)을 만나고, 또한 1947년 캘리포니아와 샌프란시스코에서, 1951-54년까지 브루클린 대학의 디자인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리고 로스코는 <라이프, Life> 잡지에 실린 <lrascibles>이라는 유명한 사진의 18명 예술가 중 한 명이 되기도, 1952년 MoMA에서 열리는 <15명의 미국인> 전시회에 참여함으로써, 1955년 시드니의 제니스 갤러리에서 그룹전과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1957년부터 그의 팔레트는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1958년에 제29회 베니스 비엔날레 전에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 마크 토비(Mark Tobey), 시모어 립턴(Seymour Lipton)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여 참여한다. 1961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계기로 런던, 암스테르담, 브뤼셀, 바젤, 로마, 그리고 1963년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1964년 <블랙폼> 시리즈라고 부르는 작업을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시기의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느낌을 가졌다. 틀의 경계가 보이지 않게, 짙은 어두운 색에 미니멀적이고 단순함은 오히려 더 강렬하게 와닿았다. 나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 비로소 사물을 분간하듯 그 넓은 검은색 톤의 화면에서 많은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속에 내포된 수많은 색깔의 사연들이 제각기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의 착각이거나 환영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결코 어둡고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강렬한 희망적인 요동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태양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힘차고 분주히 놀리는 그의 붓자국에 따라서...!
그는 1968년에 대동맥으로 3주간 입원을 하면서, 의사로부터 1미터 이상 높이의 작업이 금지되어, 처음으로 아크릴 물감과 종이로 작업을 한다. 1969년 가족을 떠나 69번지 길 동쪽 157에 있는 작업실로 이사를 한다. <Black and Gray(회색과 검은색)>이라고 알려진 갈색과 검정, 회색톤의 어두운 그림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해 6월에 마크 로스코 재단이 생기고, 예일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다. 그는 그의 작품 시그램(Seagram) 시리즈 9점을 그가 존경하는 영국작가 터너의 작품과 가깝다는 생각에서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Tate Gallery)에 기증한다. 이 시그램 시리즈는 그가 선호했던 수평 형식의 구성을 수정하여 수평과 수직의 창으로 닫힌 형태의 작업이다. 이 작품의 시작점은 10여 년 전인 1958년 건축가 필립 존슨이 뉴욕에 새로운 빌딩을 건축 설계하면서 이 마천루에 레스토랑의 장식을 위해 주문, 수락한 로스코가 제작했던 일련의 벽화다. 하지만 로스코는 그가 설계한 프로젝트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계약을 해지했었다. 우리는 이 앙상블 작품을 뉴욕도, 런던도 아닌 파리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파리 유네스코의 자코메티 조각품 곁에 걸리는 것을 논의하나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 전시 마지막 방에 자코메티의 조각품과 함께 배치해 놓은 회색과 검은색으로 분할된 수평의 작품이 그의 말년 작업이다. 이전의 작품에서는 몇 개의 직 또는 정 사각형 틀로 영역을 확장했다면, 이 작품은 틀을 없애고 화면 밖으로 이어지는 대칭적 수평 형식이다. 앞선 구성보다는 열린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만 오직 회색과 검은색의 대칭 분할에서 나는 더 이상의 큰 변화감을 느끼지는 못했고, 암울한 긴 밤의 악몽을 연상시키면서 무겁고 답답하여 우울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자코메티의 작품과 함께!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작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이유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예시나 전조는 아니었을까? 추정하며 곱씹어 보았다. 만약 더 이상의 비상이 없고 나아갈 방향도 길도 목적지도 없다면, 더욱이 화려함 뒤에 부닥친 참담한 벽이라면, 그 누구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1970년 2월 25일 그의 작업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해 5월 29일 테이트 갤러리는 예술가의 생전 지시에 따라 로스코 방 <Rothko Room>을 개장했다.
나는 늘 그렇다시피 이 장에서도 사진상의 변형된 색은 말할 것도 없고, 붓의 터치나 질감, 그 자국들의 움직이는 느낌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작품의 섬세한 부분까지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이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로스코의 작품에서는 색과 색의 경계선에 수없이 드러나는 미세한 붓의 터치와 그 겹침에서 시각적인 떨림과 스며듦이 이미지로 나타났다. 아주 묽거나 연하지도, 두껍지도 않은 물감의 층과 질감, 혼합, 그 융합된 움직임은 차분하고 조용한 요동으로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 동시에 확장된 공간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관람객 수로 보아 로스코의 작품이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고, 여덟 번째 관람을 왔다는 사람도 있으니 과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반면, 관람객이 너무 많은 탓에 나의 감동은 감삭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동안 전연 몰랐던, 처음 보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과 그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마지막 날까지 미루지 말고 일찍 감치 서둘자고 교훈 삼아 다짐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