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수집가
"이 그림은 완전 첫눈에 놀랍다. 이것은 분명히 새로운 것이다. 이 작품이 내 작업실에서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당신에게 말했잖은가?" 1912년 2월, 앙리 마티스가 그의 후원자 세르게이 슈추킨에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슈추킨(Serguei Ivanovitch Chtchoukine, 1854-1936)은 작가와 수집가라는 특수한 관계로 맺어졌다. 슈추킨은 러시아에서 또 다른 한 명의 대단한 수집가 이반 모로조프(Ivan Morozov)와 더불어 마티스의 가장 열렬했던 수집가 중 한 명이다. 그들의 경제적 받침으로 마티스의 예술세계가 거침없이 자유롭게 펼쳐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년 전(정확히 2016년 10월 22일-2017년 3월 5일)에 파리의 재단 루이뷔통 미술관에서 대규모의 <슈추킨 소장전>이 있었다. 그가 소장했던 세잔을 비롯한 반 고흐, 고갱, 피카소, 그리고 마티스의 작품들이 대거 전시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소장품이었고, 더구나 마티스의 작품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날 나는 세잔을 비롯한 마네와 고갱의 훌륭한 작품들을 새삼 볼 수 있었지만, 그중 프랑스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마티스가 모로코에서 그린 작품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의 열정적이고 강렬한 색채 감각에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려하고 뜨거운 색상, 아름답고도, 풍성한, 이색적이며 다채로운 모티브들...(마티스는 자주 벽지나 바닥의 타일을 비롯한 타피스리, 의자를 감싼 천과 커튼 등에 수 놓인 문양들을 모티브 삼아 즐겨 표현했다.) 마찬가지 모로코 실내풍경에서도 어김없이 표현된 화려하고 장식적인 무늬들. 그것들은 그 나라의 특유한 열정적 문화와 함께 마티스가 추구했던 빛과 색채, 문양에 대한 예술적 감각이 더욱 찬란하게 돋보였다. 여성의 목과 팔, 발목을 휘두른 장식품들, 오묘하게 신비스러움을 자아내는 실루엣, 의상, 벽과, 바닥의 꽃무늬 양탄자, 그 위에 대담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관능적이고도 매혹적인 모습.
그때 나는 비로소 슈추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집가로서 그의 역량과 대담한 직관, 빛나는 예술적 기호, 감각적 취향도 보았다. 그리고 이번 마티스의 전시에서도 단연 슈추킨의 존재는 빠짐없이 나타났고, 마티스와 슈추킨이 주고받은 편지, 수정과 수정으로 거듭된 모습의, 수없이 밑줄 쳐진 초안의 원본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어제 붉은 수채 그림에 대하여 2월 1일 땅제(Tanger)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신의 구상 작품을 더 좋아한다."
이 내용은 슈추킨이 마티스 편지에 대한 답장의 일부분이다. 마티스가 그에게 그림 <붉은 아뜰리에> 수집을 권유했을 때 슈추킨은 그것을 이와 같이 거절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럼에도 마티스의 그림을 수집하는 데 있어선 전혀 축소함이 없다. 그 최근 7월에 4점의 작품을, 그리고 5번째 수집으로 이어졌다. 또 이 수집가의 편지 속에는 "<La famille du peintre, 화가의 가족> 그림은 모스크바에서 굉장히 성공적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그것을 마티스의 그림에서 가장 아름답게 고찰한다."라고 덧붙였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슈추킨(Serguei Ivanovitch Chtchoukine, 1854-1936)은 러시아의 섬유 무역회사의 설립자 이반 바실리예비치 슈추킨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에서 섬유산업을 공부한 후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는 파리에 정착한 그의 남동생 이반의 영향으로 러시아 이민자들이 모이는 화려한 살롱을 운영하면서 주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로 구성된 프랑스 화가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1898년 처음으로 모네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드가, 피사로, 르노와르 등의 작품을 사기 시작하여, 1903-1904년에는 더 대담한 선택으로 세잔, 반 고흐, 고갱 등의 그림수집에 나선다. 그리고 1905년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에서 큰 호평을 받았던 야수파의 지도자 마티스에게 열정을 보인다. 따라서 슈추킨은 1906년에 마티스를 만났고, 곧 그의 모스크바 거주지인 옛 팔레 트루베츠코이(Palais Troubetskoi)를 위해 마티스에게 첫 번째 주문을 맡긴다. 그 첫 번째가 1908년에 그린 <Harmonie en rouge, 붉은색의 조화> 그림이다. 이어서 그는 1909-1910년 자신의 궁전(저택) 계단에 설치할 그림으로 마티스의 춤(<La Danse II>과 음악 <La Musique>)을 주문한다. 이 자금으로 마티스는 이시네물리노(Issy-les-Moulineaux)의 대규모 작업장을 건축하는데 쓴다.
역시 이 작품, 춤과 음악을 나는 오래전에 에르미타쥬 박물관에서 처음 봤을 때 그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2006년 남편과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트르부르크에 내려 푸쉬킨 미술관과 에르미타쥬 박물관을 방문했었다. 그때 마티스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 레닌 그라드에 있는 에르미타쥬 박물관에서 마티스의 작품 춤과 음악(<La Danse II>와 <La Musique>)을 대했을 때 그 평화롭고 자유로운 느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흥분과 감동, 감탄이 중첩되는 순간이었고, 힘든 여행객의 발걸음을 쉬어가게 해 주었다. 그 서정적이고 평온한 느낌에서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이 두 작품은 대형 캔버스에 그려져 한 벽면에 한 작품씩 마주 걸려 있었다. 마치 드넓은 초원에서 플루트와 바이올린 연주에 따라 노래하는가 하면, 맞은편에서는 음악에 맞춰 양팔을 벌려 손에 손을 잡고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 율동적이고 리드미컬한 모습은 매우 흥겨운 나머지 금방이라도 캔버스에서 뛰쳐나와 내게 함께 춤추자고 팔을 내밀 것만 같았다. 그리고서 내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가더니 힘차게 팔다리가 뛰쳐 올라 빙빙 돌며 원을 그릴 것만 같았다. 이 아무런 거추장스러운 장식도 불필요한 내용도 없는, 단조롭고, 그러나 힘차고 단단한 역동적인 구성. 그래서 더 강하게 다가왔다. <음악>은 <춤>보다 정적으로 보이는 것 같으나 그 또한 전혀 부족함 없이 내적 역동성이 느껴졌다. 이것이 마티스의 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시 나는 <음악>에 더 마음이 갔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여기 등장한 벌거벗은 인물들에게서 평화롭고 자유롭다는 느낌 외에 그 어떤 다른 외설적인 착안을 주지 않는다. 오직 그 공간을 풍성하게 꽉 메운, 여름 같이 산뜻하고, 즐거움이 가득 찬 느낌만을 안겼다. 아마도 그 공간에는 우리만이 있었기에 가능했었고, 그래서 그 인상은 더욱더 강하게 남았던 것이다. 사실 파리의 루이뷔통 미술관에서는 당시에 느꼈던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관람객이 너무 많았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오리지널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이다. 그리고서 그 순간의 환경과 분위기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이 들었던 대목이다.
참고로 이 그림 <춤>은 두 버전이 있는데, 그중에 <La Danse I>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그리고 두 번째가 생트-페트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있다.
슈추킨은 특히 피카소의 큐비즘(입체파) 초기 주요 작품인 청색과 분홍(bleu et rose) 시기의 걸작품 50점과 마티스의 주요 작품 38점을 포함하여 다수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작품들을 대량 소장한 자신의 컬렉션을 1908년부터 매주 일요일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모스크바 사람들이 프랑스 아방가르드 화가들을 발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슈추킨 컬렉션은 그가 1918년 8월 독일로 이주한 후 그해 11월 레닌의 법령에 따라 국유화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그의 옛 궁전저택을 현대 박물관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다음은 푸쉬킨 박물관의 관장이었던 이리나 안토노바(Irina Antonova)가 수집가 슈추킨을 두고 했던 말을 옮겨보면, 이 표현이야말로 슈추킨이 오늘날 러시아에 남긴 20세기 현대미술의 큰 업적을 알 수 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과 다른 박물관에서 거부당한 인기 없는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그는 아마도 세상을 변화시킬 사건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집가는 혁명을 기다리는 나라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는 모든 대격변을 예시한 예술품을 수집했다."
그 이후 슈추킨은 가족과 함께 독일을 거쳐 프랑스로 이주했고, 다시 니스를 거쳐 파리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193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이 컬렉션은 소위 형식주의 부르주아 미술에 반대하는 1948년 스탈린주의 캠페인에 희생양이 되었고, 현대 미술관은 청산되었으며, 그 컬렉션은 모스크바의 푸쉬킨 박물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레닌그라드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공유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이 작품들은 점차 다시 나타나 오늘날 러시아 박물관의 보물 중 하나가 되었으며, 오늘날 푸쉬킨과 에르미타쥬가 세계적인 박물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