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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 Jun 19. 2024

사진에 대하여


평일에는 일로 마음이 바빴다면 반대로 주말은 마음은 편한데 몸이 바쁜 느낌이다.

출근은 하지 않지만 9시 전에 일어나 부지런히 방을 청소하고 밀린 빨래까지 돌리면 상쾌한 기분이 든다.


청소를 마치고 책상에 앉는다. 오늘은 미루고 미뤄왔던 숙제를 하는 날이다. 아이폰 앨범의 사진들을 정리할 참이다. 그동안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맥북과 아이폰의 동기화 기능에 새삼 감사하며 노트북을 켠다. 세상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참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2019년의 여름, 파란 컨테이너 건물 앞에서 수줍게 포즈를 취하는 한 남자의 사진이 있다. 텐셀 소재의 파란색 반팔 티셔츠와 생지 데님을 입고 있다. 서른 살의 그는 지금보다 훨씬 말랐지만 생기 있어 보인다. 우리가 그날 무얼 했던가. 두 번째 만남이었고 아마 건대를 갔을 것이다. 무한리필 고기를 먹었고 커먼 그라운드에 갔었다. 그날 처음 그의 사진을 찍어줬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우리는 참 많이 만났다. 밤에 만나 다음날 아침까지 24시 카페에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성수를 기약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때 내가 하고 있던 게 사랑이었다면 지금 하고 있는 건 무엇일까.


두 번째 사진은 남산이다. 케이블카 안에서 각각의 손에 들려진 오렌지 에이드 두 잔. 케이블카 밖으로는 만발한 벚꽃이 보인다. 그날 치마에 구두를 신고 남산을 오르느라 진을 좀 뺐다. 태어나서 처음 타 본 남산 케이블카. 그날 기분이 참 좋았었다. 늘 밖으로 나돌길 좋아하는 여자친구 때문에 내향형인 그는 참 많이도 돌아다녀야 했다. 그렇게 졸라서 가장 멀리 간 곳은 강릉. 같이 부산 바다는 한번쯤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부산을 함께 가지 못한 게 아쉽다.


마지막 사진은 남녀의 사진이다.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끼고 기대고 있고 남자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날 그의 집 근처에서 브런치를 먹고 평소처럼 헤어졌다. 차를 산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집 앞에 데려다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때도 그랬다. 평소처럼 멀어지는 그의 차를 보며 손을 열심히 흔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한번 더 안아볼걸 그랬나.


나는 고민하다 결국 단 한 장의 사진도 정리하지 못했다. 애초에 삭제할 생각조차 없었다. 우리가 만났던 5년, 미성숙했던 나는 그가 만들어 준 포근한 온실에서 무럭무럭 성장해 어른이 되었다. 밥먹듯이 죽음을 생각하던 그때, 그는 몸과 마음이 가난하던 내게 손을 내밀어 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늘 외로운 내게 연인이었고, 오빠였고 아빠였다. 나는 우리의 5년을 앞으로도 결코 내 손으로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2019년에 여름에 만나 2024년 봄에 헤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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