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어서어서' 책방을 가본 적이 있나요?
경주에 갈 때마다 비가 온다. 몇 년 전 친구들과 갔던 여행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꼼짝없이 우산과 한 몸처럼 붙어 있어야 하나. 경주역에 도착하자마자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탄식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뚜벅이 여행이라 이동조차 여의치 않다. 회사 동료들과 워케이션 겸 간 여행이라 백팩에는 무거운 노트북까지, 왠지 평탄한 여행이 될 것 같지 않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래도 서울에서 ktx를 타고 3시간이나 달려 여기까지 왔다. 내가 직접 달려온 것은 아닐지라도 날씨 따위가 우리를 막을 수는 없다. 짐을 보관하고 황리단길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몇 년 전에는 없던 네 컷 사진 전문점이 곳곳에 보인다. 여기도 월세 내기 쉽지는 않겠다. 그래도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다른 지역보다는 대기업의 손을 덜 탄 모습에 살짝 마음을 놓는다.
어랏, 음식점과 카페 소품샵, 그리고 소품샵 소품샵만 연달아 이어지던 길가에 협소한 크기의 책방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간다. 평수가 작아 책이 적을 것 같았는데 최신 서적부터 베스트셀러까지 책이 꽤 많다. 무기로도 쓸 수 있을만한 무거운 노트북에 거치대까지 가져온 처지를 잊고 책방 사장님이 직접 썼다는 책에 에코백까지 산다. 난 이제 집에 갈 때 죽었다.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요즘 사람들이 sns에 올릴 사진만 찍고 책은 안 사서 독립서점의 매상이 시원치 않다는 소리를 들었다. 같잖게 개념 있는 척을 해본다. 경주에서의 책방에 대한 기억은 이게 끝.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경주에서 사 온 책을 펼쳤다. 사장님 카드 수수료 걱정했었는데, 알고 보니 사장님은 식당을 경영한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그렇게 어렵다는 독립서점으로 이윤내기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사업가란다. 역시 남 걱정은 하는 게 아니었다. 내 폭락한 미국주식 수익률을 걱정해야 하는 거였다.
경주에서 사장님이 쓴 책을 산 이유는 정말 단순히 '궁금해서'였다. 홍대 길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젊은 장발의 남자가 경주의 서점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책에 미치게 만들었을까.
책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은 황리단길의 책방 '어서어서'를 운영하고 있는 양상규 씨의 인생과 책, 그리고 그의 인생과 책이 모두 담긴 결정체인 서점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경주 토박이인 그가 사진기사, 새마을금고 직원, 식당 주인부터 궁극적으로 책방을 운영하기까지의 타임라인이 정리되어 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가장 좋은 책은 읽기 쉬운 책이다.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등단을 했던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은 그냥 어려운 책이다. 2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순식간에 후루룩 읽혔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그는 분명 새마을금고에서 고객 하나하나를 위한 맞춤 응대를 하고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편 책에서 그는 빈 가게에서 자신만의 서점을 열기 위해 셀프 인테리어를 하고 있곤 했다.
사람이 추진력이 있어야 뭐든 하는구나.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의 철학도 멋졌다.
우리는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더 배우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자주 책을 통해 공감이나 위로나 연대 같은 것을 얻잖아요. 그게 따듯함이 되고 위안이 되어 우리가 또 세상을 살아갈 기운을 내게 하고요. 그게 바로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요.
아하, 그래서 책을 사면 처방전이라고 적힌 종이봉투에 책을 담아 고객에게 주는 거였구나. 책으로 마음을 치유하라고.
하나하나 다 말로 할 수 없어 서점 곳곳에 붙여둔 메모가 벌써 여남은 장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또 써 붙이고, 또 이야기하는 것은 책을 읽고 책을 고르기 위해 이곳에 온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어서어서이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도 까칠한 사장의 소임을 다하는 필연적인 이유다. 필요하다면 더 까칠해질 것이다!
안내문이 많아 사장님 성격이 예민한가 했었는데 책방의 손님들을 위해 일부러 악역을 자처하는 거였구나.
우리는 간혹, 아니 나는 간혹 유명한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진료보다 tv에 출연하는 시간이 더 많은 쇼닥터의 병원이 붐비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다시 한번 느낀다. 전문가는 다른 게 아니라, 내 일에 진심이고 철학이 있어야 전문가인 거라고.
경주 황리단길에는 서점이 하나 있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어디서도 없는 서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