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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수 Nov 17. 2019

청명(淸明)

                                                                                                                                                                                                                                     


오늘은 청명(淸明)과 한식(寒食)이었다.

청명과 한식은 거의 병칭(竝稱)된다.

대부분 같은 날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청명은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로 '하늘이 점점 맑아진다'는 뜻이다.  

태양의 황경(黃經)이 15도에 있을 때가 청명이다.  

춘분이 있었던 때로부터 15일 후이고, 곡우(穀雨)가 있기 15일 전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청명의 15일 동안을 5일씩, 3후(候)로 세분해 설명했다.


첫번 째 5일은, 오동나무의 꽃이 피기 시작하고,

두번 째 5일은, 들쥐 대신 종달새가 나타나며,

세번 째 5일은, 무지개가 처음으로 보인다고 했다.


청명은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청명조(淸明條)의 기록에 

따르면, "청명엔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친다"고 나와있다.  

즉 내병조에서는 청명일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느릅나무나 버드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안으로 

끈을 넣어 통과시킨다.

삼으로 만든 끈은 워낙 튼튼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양쪽에서 톱질하듯 서로 잡아당겨도 오래

 버틸 수 있다.

그렇게 밀고 당기면서 빠르게 마찰시키면 불이 붙게 된다.


임금이 그 불을 홰에 붙이는 의식을 행하면, 그 불을 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문무백관, 360 고을의 

수령에게 나누어 주었다. 

수령은 다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온 백성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운명체로서의 국가 의식을 다진 것이다.

꺼지기 쉬운 불은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통인 장화통(藏火筒)에 담아 팔도로 불을 보냈다.

그 불씨통은 뱀이나 닭껍질로 만든 주머니로,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씨앗 태운 재에

묻어 운반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사화(賜火)라고 불렀다. 

이는 새봄이 시작되는 절기이므로, 불을 일으켜 만물이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병조 주관으로 내병조에서 행했다.

전에 블로그 글에서 다루었던 '찬수개화식'과 비슷하지만 별개로 시행했던 풍속이다.

조선 정조 때의 문신 김매순이 1819년에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인 <열양세시기

(冽陽歲時記)>에는 <동국세시기>와는 달리, 불을 나누어주는 일을 한식조(寒食條)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청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화창한 날이 시작되는 청명에는 청명주(淸明酒)를 마시고 나무를 심었으며 또 ' 내 나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메마른 나무에 물이 오르는 시기인지라 나무 심기에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식목일 행사를 한다. 

청명이면 나무를 심는데, 특히 '내 나무'라 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시집 장가갈 때 

농짝을 만들어 줄 재목감으로 나무를 심었다.

남자는 연정(戀情)을 품은 아가씨가 있으면, 그 아가씨의 '내 나무'에 거름을 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시하기도 했다.   


나무 관련 풍습이 많은 것은 청명이 나무심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청명은 일 년 중 하늘이 가장 맑은 날이어서 옛부터 청명에는 풋 채소와 산나물을 먹어야

좋다고 했다. 

또 청명주를 담구거나 장 담구기를 했고, 조기잡이를 하기도 했다.


             淸明時節雨紛分     청명시절에 비가 어지럽게 내리니

             路上行人欲團魂     길 가는 나그네는 애간장 끊어지려 하네.

             借問酒家何處在     묻노니, 주막이 어디 있는가?   

             牧童遙指杏花村     목동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 


당나라 詩人 두목(杜牧)의 '淸明'이란 시이다.

타향에서 맞은 청명절의 흩날리는 빗속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리고 싶은 나그네의

마음을 담고 있다.   


한식(寒食)은 사람들의 착각과 달리, 24절기에 들지 않는다.

고대 민속 신앙에서 비롯된 날이기 때문이다.

대신 설, 추석, 단오 명절과 함께 우리 민족의 4대 명절에 속한다. 

한식은 원래 한국의 풍습이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절기였으나 한국에 토착화 돼

큰 명절이 되었다.

한식(寒食)의 기원은 중국 진 나라의 충신 '개자추'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전해진다.


<개자추(介自推) 전설>을 보면, 중국 춘추시대에 公子  중이(重耳)가 망명해 유랑생활을 

할 때, 공자가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본 '개자추'는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바쳤다.

중이는 진나라의 문공(文公)이 된 뒤, 충신들을 포상했다.

한데, 충신 속에 포함되지 않은 '개자추'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숨어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문공은 잘못을 뉘우치고 '개자추'를 찾았다.

그가 끝까지 산에서 나오지 않자 문공은 산에다 불을 놓으면 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곤 불을 질렀다.

그러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홀어머니와 함께 꼭 껴안은 채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 숨진 채 발견됐다.

이때부터 '개자추'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한식(寒食)에는 불을 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한식을  냉절(冷節) 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한식 날, 종묘(宗廟)와 각 능원(陵園)에 제향을 보내고, 관공리(官公吏)들에게

공가(公暇)를 주어 성묘하도록 했다. 

또 어떤 죄수에게도 형을 집행하지 않도록 금지시켰다.

한식 날에는 조상들에게 한식 차례를 올리기도 하고, 사초도 하며, 상석이나 비석을 세웠다.

한식 날은 일명 '손 없는 날', '귀신이 움직이지 않는 날'이라고 전해진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흙으로 만들어진 부뚜막을 손질하고, 벽을 고치고, 방바닥을 손질하는 등의

일을 하기도 했다.   


한식일(寒食日)에는 불을 금하는 날이기 때문에, 지상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지신(地神)이

별로 할 일이 없다는 관계로, 천상에서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지상에 있는 모든 지신들을

소집시켜서 명령을 하달하는 날이라, 지상을 감독하는 지신이 없는 틈을 타 몰래 살짝

하는 것이라 무해, 무탈하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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