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김지영' 개봉 3일차였던 어느 밤, 집에서 엄마가 무채를 무쳤다. 간이 좀 짜긴 했지만 어떠냐 묻길래 건성으로 맛있다고 대답했다. 퇴근하자마자 저녁상을 차렸다가, 치우고, 고무장갑에 물기가 마르기도 전에 냉장고에 반찬거리가 없다며 졸린 눈을 꿈뻑거려가며 만든 반찬이었다.
아빠는 옆에서 한국시리즈 3차전을 보고 있었다. 딱 봐도 지지부진한 경기에 한창 심취해있었다. 그러다 엄마가 한번 맛보라며 준 무채를 먹자마자 “어유, 짜”하며 얼굴을 찌뿌렸다. 건성으로 한마디도 덧붙였다.
“피곤하게 이런 걸 지금 왜 해.”
말을 예쁘게 하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아빠가 언제 무채 한번 무칠 생각이나 해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옆에서 듣다가 어이가 없어서, 순간 ‘그럼 아빠가 만들게?’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뻔 했지만 잘 참았다. 그런 말을 해봤자 ‘너나 잘해’나 ‘아빠한테 버릇없게’ 같은 말들이 돌아올 것도 뻔했다. (심지어 엄마가 하는 대사다.) 엄마는 나 대신 눈을 한번 흘기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는 유리 반찬그릇에 무채가 소복이 담겨있었다. 아빠는 마치 무채의 존재 자체를 잊은 것처럼, 다른 건 다 먹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무채는 먹지 않았다. 나는 평소 좋아하는 반찬이 아닌데도 연거푸 무채만 집어먹었다. 소심한 반항이라고 생각했는데, 네번째 젓가락질 쯤이었을까. 씩 웃고 있는 엄마랑 눈이 마주쳤다. 엄마가 계속 보고 있었나보다. 새초롬하게 ‘나는 다 알지’하는 표정으로.
엄마는 언제부터 다 알고 있었을까? 아주 어릴 땐 엄마가 우리집에서 악역을 맡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부부 간에 잔소리를 하는 쪽은 무조건 엄마였으니까. 엄마만 넘어가주면 될 일인데 굳이 나쁜 말을 해서 집안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게 어린 마음에 싫었나보다. 평화주의자인 나는 ‘왜 그래 엄마~’하며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한참 지나고나서 보니 엄마는 그때 오히려 얼마나 외로웠을까? 평화는 점차 침묵을 불러왔고, 착하고 성실한 아빠가 이따금 놀라우리만치 무심하게 말을 툭 던지면 당황스러워하는 것은 고스란히 엄마와 내 몫이었다. 아무런 악의가 없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싸우자고 한 말도 아닌데 바득바득 싸워서 뭐에 쓰나 싶어서 때론 장난스럽게 한 마디 하거나, 똑같이 투덜대기도 하지만 아무말 없이 그저 넘겨버리는 날이 아마 태반이었을 거다.
아빠는 사실 좋은 아빠다. 주변사람들도 그렇다고들 말한다. 이모들은 형부 참 착하다고, 엄마 친구들은 엄마가 남편 제일 잘 만났다며 칭찬한다고 한다. (엄마는 기 살려주듯이 일부러 이런 말들을 크게 아빠 들리게 전한다.) 엄마가 빨래를 널 때 아빠도 양말 수건 정도는 넌다. 심부름에는 군말없이 나선다. 나도 안다. 아빠 정도면 좋은 아빠란 걸. 근데 그래서 더욱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내가 그런 아빠한테 팩폭을 날리고 ‘그 정도면 좋은’이란 훈장마저 뺏어가면, 엄마 속이 텅 비어버릴까봐. 너무 슬퍼질까봐. 요즘은 종종 ‘그 정도면’ 이라는 수식어가 너무 많은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 눈치 봐 가며 잔소리를 좀 하고 있다.
고작 무채다. 반찬거리 중에 주목받지도 못하는 무채 한젓가락 편하게 먹자고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한다. 왜냐하면, 이해하고 싶어서. 아빠를 이해하고, 심지어는 아빠를 이해해주는 엄마의 마음마저 이해하려고 한다. 굳이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면, 사랑하니까. 엄마아빠는 옛날 사람이니까 억지로라도 이해해주고 싶다. 사랑해서 이토록 애쓰고 이해하는데, 이런 말을 꺼내면 내 또래들은 혐오하지 말란다. 그치만 이런 얘기쯤 난 숨쉬듯이 할 수 있다. 제 살 깎아먹는 얘기일까? 충분히 잘 해내고 있는데 만족을 못 하는 걸까. 말문 막히는 세상, 실은 이보다 더한 일들이 차고 넘치는데 이런 일쯤 눈감고 살아버릴까 싶은 순간들이 너무 많아서 더 말을 못한다.
근데 엄마한테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무채 완전 맛있었다고. 언젠가 엄마에게 배워서 만드는 내 것에서도 아마 같은 맛이 날 거라고.
이대로 끝내자니 왠지 또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아빠한테 하고싶은 말은 별거 아니야. 사랑하고, 이제 반찬투정은 하지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