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증폭기로써의 인간, 환상이자 동시에 실재인 자유의지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서, 뉴턴 이후로 과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기계적 결정론이 우위를 점해 왔고, 인간의 자유는 설 자리를 잃어가며 종교와 형이상학에 기대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라플라스의 악마'가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소멸하고, 고전적 물리학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과학적으로 '실재하는 자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 의해 양자 현상 어딘가에서 자유의지를 찾으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허나 양자역학은 기계론의 중대한 결함을 밝혀내긴 했지만, 그 자체의 무작위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의 행동이 순수하게 무작위적으로 정해진다면, 그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미시적인 수준에서 나타나는 양자 현상이 거시적 세계로 넘어오면 영향력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개개의 입자는 무작위적으로 행동하더라도, 그 입자들이 뭉친 거시적 물체의 거동을 설명하는 것은 고전물리학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간단하지만 확실한 논증으로, 양자적 현상이 인간을 통해서 거시적인 세계로까지 증폭될 수 있음을 보인다.
여기 결혼 상대를 정하려는 물리학자 존이 있다. 그는 이제 양자 현상을 이용해 앤과 앨리스 중 누구에게 청혼할 것인지를 결정하려 한다. 슬릿을 통과하는 전자는 스크린의 왼쪽(앤) 또는 오른쪽(앨리스)에서 발견된다. 이제 그가 쏘아보낼 전자는 앞으로 그의 인생에 커다란 - 거시적인 - 영향을 미칠 것이다(물론 상대가 청혼을 받아준다면 말이다). 이 실험을 하기 전까지 존의 모든 행동이 완벽히 결정론적으로 예견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정론은 다가올 순간 존의 결혼 상대를 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만약 이 전자의 거동이 결혼 상대가 아닌 핵미사일 발사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인류의 운명이 양자적 무작위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이 때 이 선택이 동전이나 주사위 따위를 던지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동전과 주사위는 결정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서, 100원짜리 동전을 던져서 나온 이순신 장군이 인류를 구원하더라도 '이조차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슬릿을 통과하는 전자의 거동은, 양자역학이 옳다면, '이 세계 안에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무작위'에 의해 결정된다.
...존이 벌인 양자 구애 행위는 이 세상에 속한 무언가가 결정하지 않은 결과를 내게 된다. (301페이지)
이와 같은 사고실험으로, 인간은 분명 미시적인 양자 현상을 거시적인 수준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은 필경 뇌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뇌는 어떻게 양자 증폭기로 작동하는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설명은 '혼돈계'(chaos)다. 혼돈계에서는 아주 작은 초기조건의 차이가 커다란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혼돈계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날씨다. 나비의 날갯짓이 토네이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혼돈 이론을 배운 사람은 기상청을 쉽사리 비난하지 못한다.
인위적으로 혼돈계를 만들어내는 방법 중 하나는 자기순환적인 회로를 만드는 것이다. 즉, 입력을 받아 내놓은 출력값이 다시 자신의 다음 입력값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반복을 여러 번 거치다 보면, 초기조건의 작은 차이가 커다란 차이로 증폭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매우 복잡한 회로지만,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혼돈계의 성질을 지니는 듯하다(346페이지 참조). 혼돈계도 여러 유형이 존재하는데, 많은 자기순환적 혼돈계들은 '끌개'(attractor)들을 가지며 계는 종종 국소적으로 안정적인 끌개 주위를 맴돌게 된다. 이는 분명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작위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 뇌와 비슷하다. 놀이터의 그네를 보면 어린 시절 짝사랑이 떠오르고, 옛날에 살던 마을이 떠오른다. 여기서 초등학교 시절의 선생님과 교실 풍경이 떠오를 수도 있고, 주말에 옆집 아주머니가 구워다 주신 쿠키의 맛이 생각날 수도 있다. 그 뒤로도 연상은 끝없이 뻗어나갈 수 있고, 이런 생각의 흐름은 의식하기 전에 먼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머릿속 회로에서 연관이 되어 있는 것들을 떠올리며 - 국소적으로 안정된 상태들을 오간다 - 완전히 무작위적인 생각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저자는 여러 연구결과를 제시하며, 인간의 세포 안에서 나타나는 양자적 현상과 인간 뇌가 이루는 혼돈계의 성질이 협동하여 우리의 마음이 여러 끌개들을 오가게 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을 만들어 낸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2000년대 초반에 써진 책이고, 이때쯤 와서는 라플라스를 비롯한 기계론자들이 주장했던 자동인형으로써의 인간, 기계적 결정론은 거의 파훼된 듯 보인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있다. 여기서 '자유의지'는 어디 있는가?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런 질문 자체가 이제는 오류라고 생각한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방법, 점심 메뉴와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반려자나 직업과 같은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는 방식? 순간순간, 매일의 선택 그 위에 어떤 추상적인 '자유의지'란 것이 존재해서 그것이 내가 선택하는 방식을 지시한다는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아직 모든 것에 이유가 존재한다고 하는 결정론의 악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양자역학은 인간을 결정론으로부터 해방시켰고, 우리의 뇌는 우연적인 양자의 요동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뇌가 작동하는 방식 -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상태들 - 은 우리가 겪어온 경험과 삶에 의해 그 가능성들이 정해진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자유의지의 발현이다.
생명의 양자 바탕이 내게 일깨워주는 점은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우주 속에 원래부터 들어 있는 자유를 한껏 끌어모아 증류하여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그마한 그릇에 채움으로써 기묘하면서도 섬뜩할 만큼 완벽하게 운명을 농축해낸다. 본디 누구의 자유였는지는(애당초 누군가의 자유이기는 했다면) 모르겠으나, 그 자유는 뚜렷이 존재하며 내 존재를 이루는 실의 가닥마다 틀림없이 짜여 들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비록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말이다. (38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