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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eon Dec 26. 2020

캐롤의 오리지널리티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 수가 잘 늘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편곡, 리메이크, 재즈 버전, 락 버전이 있지만, 어떤 캐롤이든지 익숙하고 그리운 어떤 멜로디가 곡 중간에 들려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캐롤임을 안다. 세계적인 가수들도 시즌이 되면 익숙한 멜로디가 담긴 앨범을 내고, 새로운 캐롤들 중 몇 년 후 겨울에도 길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건 몇 곡 되지 않는다(94년에 나온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캐롤로써는 최신곡인 셈이다). 그리고 오래된 캐롤이든 새로운 캐롤이든, 우리는 그것을 잠시 듣고도 금방 캐롤임을 알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으면 그 곡은 캐롤이 아니다. '캐롤'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음악적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으며, 사실은 그 이미지가 캐롤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다가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생각으로 글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면 뭔가 김이 빠지곤 했다. 분명 그 글은 내가 쓰려는 글과는 다른 글이지만, 내 생각이 최초가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어떤 실망감이 드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집착은 내가 과학을 하려는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과학에서는 어떤 새로운 비유와 문학적 표현보다도 그 핵심적 내용의 고유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물론 이건 원론적인 이야기고, 실제로 연구를 하다 보면 이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의 비중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문제는 세상에 특정한 이름의 단백질의 세포 내 위치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비해, 행복, 사랑, 가치, 또는 일상적인 주제들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온갖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생각도 누군가가 이미 했던 생각의 변주일 것이다. 부당하게 고통받는 누군가를 보고 새벽에 뒤척이며 떠올린 어떤 정의(正義)에 대한 생각은 분명 과거의 어떤 철학자가 생각해내고 알아듣기 힘든 말들로 책까지 써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도 해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떠올린다면, 그건 아마 애초에 전혀 말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거다.


근 몇 달은 정말 바쁘기도 했지만, 이런 생각 때문에 쓰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글을 잘 올리지 못한 것도 있다. 내가 쓰는 수필들이 누군가는 이미 진즉에 깨달은 소소한 진리에 대한 공연한, 뒤늦은 소란이 아닐까? 그러다 어제 피천득의 글을 읽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 피천득, <수필> 중


글에 대한 글 하나가 두 번에 걸쳐 나를 깨웠다. 첫째로, 이미 수없이 써졌을 수필이라는 글의 갈래를 다시금 정의하는 방식이 이처럼 얼마든지 새롭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로, 내가 새로운 종(種)의 꽃을 발견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많겠지만, 나와 같은 특정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훨씬 적을 것이고, 나의 수많은 경험들을 조합하여 어떠한 생각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건 마음의 여유다. 그동안 글을 쓰지 못한 것은 그러한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던 탓인가 한다.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집착 역시도 스스로에게 여유를 허하지 않은 것이다. 늘 어떤 일이 끝나면 여유를 가져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여유는 저절로 찾아오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깨달음을 통해 여유를 내면화할 수 있기를.


누군가가 마이클 부블레의 White Christmas를 들을 때, 누군가는 엘비스 프레슬리, 레이디 가가의 버전을 듣고, 누군가는 코니 탤벗의 앳된 목소리를 통해 같은 멜로디를 듣는다. 어딘가의 길거리에서는 익명의 Various Artist가 부른 White Christmas가, 아늑한 카페에서는 가사가 없는 재즈 버전의 피아노 선율이, 어둑한 방의 TV에서는 흑백 필름의 <Holiday Inn>에서 빙 크로스비의 원곡이 흘러나온다. 여러 색을 띈 같은 멜로디가, 그저 그 주위의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겨울에 새로운 White Christmas를 내놓는다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트리의 불빛이 따뜻하게 반짝이는 방에 앉아 재생 버튼을 누르고, 익숙한 멜로디를 기다리다가 미소짓고, 그러다 중간에 숨겨진 그만의 고유한 색 - 꼬부라진 꽃잎을 발견하고 기뻐하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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