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대학원 자치회 이야기
본 기사는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K-club 기자단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대학원은 고독한 곳이다. 전문화된 학문을 하며 각자의 우물을 깊이 파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자신이 하는 연구는 자신이 제일 잘 알아야 하고, 그것은 곧 자기 연구에 있어서는 어디에 의지하거나 보고 따라할 것이 없으며, 자신이 길을 찾아 나가야 함을 뜻한다. 내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각오를 다지는 데 가장 큰 힘을 얻은 책의 구절을 소개한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 『인연』에 실린, 유학을 떠난 딸 서영이에게 보내는 편지다.
학문하는 사람에게 고적은 따를 수밖에 없다. 혼자서 일하고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전부이기에 일상생활의 가지가지의 환락을 잃어버리고 사람들과 소원해지게 된다. 현대에 있어 연구 생활은 싸움이다. 너는 벌써 많은 싸움을 하여 왔다. 그리고 이겨 왔다. 이 싸움을 네가 언제까지 할 수 있나,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리고 너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다는 것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학원생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같은 처지의 대학원생일것이다. 그런데 같은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학부에 비하면 대학원은 갈라파고스 같은 곳이다. 같은 과 소속이라도 서로 얼굴도 모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서로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며, 연구실마다 문화도 달라서 어떤 연구실에서는 당연한 일이 어떤 연구실에서는 말을 꺼내기조차 힘든 경우도 많다. 학부에는 다양한 학생 사회 기구와 행사들이 잘 정착되어 있어 학생들 간의 교류나 의견 수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만, 대학원은 ‘각자도생' 분위기가 강하다.
아무리 학문의 길이 고독해도, ‘함께'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연구의 협업뿐만이 아니더라도,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대학원생들이 어떤 느슨한 공동체를 이룬다면 어떨까.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웃으며 인사를 할 수 있고, 연구실 생활의 고민이나 문제를 털어놓을 곳이 있고, 어떤 실험이나 전문 분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을 때 물어볼 사람을 떠올릴 수 있고, 혼자서는 배우기 어려웠던 것을 같이 공부할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학부 때 보았던 우리 학과의 대학원 자치회가 떠올랐다. 대학원 총학생회는 여러 대학에 있지만, 학과 단위의 자치회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부 때는 그런 걸 잘 모르고 자치회 행사에 가서 피자를 얻어먹으며 좋아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참 좋은 기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치회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지를 서면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았다.
다음은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대학원 자치회 구성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정리한 답변이다.
Q1. 서울대 생명과학부 대학원 자치회는 어떤 활동을 하는 곳인가요?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대학원 자치회는 대학원생의 권익 증진과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원 소모임 활동, 게임 대회, 피자 파티’ 등의 사교활동을 주최하거나, ‘통계학 강의, 일러스트 강의’ 등 대학원생들에게 필요한 수업을 열기도 했습니다. 특히 학내 이슈에 대한 대학원생 의견을 수렴하는 활동을 주로 합니다. 예를 들어서 최근에는 코로나 19 신속분자진단 도입에 대한 자연과학대학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한 적이 있습니다.
(참고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22&aid=0003553979 )
Q2. 왜 자치회 활동을 하시게 되셨나요?
현재 자치회 회원은 총 6명입니다. 사람수는 이보다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었습니다만 사람들이 자치회 활동을 하는 이유는 항상 다양했던 것 같습니다. 행사 포스터 만드는 것이 재미있다면서 소일거리로 한 사람도 있었고, 다른 연구실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시작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활동 동기는 다양하지만, 대학원 사회를 개선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것은 다 같았던 것 같습니다.
Q3. 자치회 활동을 하면서 보람이나 기쁨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또는 자치회에서 이런 것을 해내었다고 자랑할 만한 일은 무엇인가요?
저희가 주최한 행사에 사람들이 즐겁게 참여하거나, 유용한 정보를 학생들에게 제공할 때가 가장 기쁩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행사를 열기가 조심스럽지만, 피자 파티, 우수 졸업생의 박사 세미나, 일러스트-통계 특강 등 많은 행사들을 주관해왔습니다. 학기 별 우수졸업생들의 박사 세미나, ‘닥터베르’ 웹툰 작가 초빙 세미나 등 저희가 하는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좋은 평가를 해줄 때가 특히 자랑스러운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저희가 개설한 통계 특강 수업에 호응이 너무 좋아서 추가 강의를 열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이런 순간들이 가장 보람을 줍니다.
자치회로서 목소리를 내서 실생활에 영향을 주는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것들도 즐거운 경험입니다. 간혹 쉽게 고쳐질 일들도 오랜 기간 동안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저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학교와 연락을 주고받으면 학생들이 불편해 하는 일들이 쉽게 개선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 건물 앞 계단이 파손돼서 사람들이 발을 자주 헛디디곤 했는데, 학교 시설과에 연락해서 손쉽게 고친 적도 있었습니다.
Q4. 대학원 생활과 자치회 활동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신가요?
자치회 활동이 대학원 생활에 부담을 지우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회의도 격주에 한 번 하는 정도이고, 실험 때문에 불가피하게 빠지는 경우에도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입니다. 실험이 너무 바쁠 때 자치회 일이 겹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힘든 것보다 보람이 커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지내다 보면 요일을 까먹기도 하는데, 자치회 활동이 오히려 반복되는 대학원 생활 중간중간에 마일스톤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Q5. 많은 대학원에 대학원 총학생회는 있지만, 학과 단위의 자치회가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원 총학생회에 비해 자치회가 가지는 강점으로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학생 자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표성입니다. 전체 대학원 사회에 큰 문제들, 예를 들어서 등록금 관련 문제를 논의하는 데에는 단과 단위 대표자들이 주도하기는 어렵죠. 학과 단위의 자치회로써 가장 큰 강점은 학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과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필요한 부분을 조율할 수도 있고, 행사 기획부터 예산 집행, 건의 사항 처리까지의 과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습니다.
대학원생들은 연구적으로 도움이 필요하거나, 실험 재료를 급하게 구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저희는 인적 네트워크를 학과 단위에서 비교적 쉽게 형성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증진함으로써 대학원 생활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도 학과 단위 자치회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6. 학과의 교수님들께는 협력을 구해야 하지만, 때로는 의견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치회와 교수님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고, 어떤 어려움이 있나요?
전반적으로 교수님들과의 관계는 좋게 유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저희가 활동하는 과정에서 학과 교수님들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고, 저희 활동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대학원생 인권 관련 공청회를 가보면, 생각보다 많은 교수님들이 참여합니다. 2020년에 카이스트에서 대학원생 인권 타운홀 미팅이 있었는데, 참여자의 절반 정도가 교수였습니다. 대학원 사회를 개선시키고, 대학원생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Q7. 대학원 자치회가 대학원생들의 행복 / 연구 및 진로에 각각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자치회 활동의 질문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들이 필요로 하는 점을 대변해서 환경을 개선하거나 사교 활동, 교육 활등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는 수요조사를 통해서 학생들이 통계분석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후 통계학과 대학원생과 생명과학부 관련 전공자를 섭외해서 수업을 열었습니다. 많은 수강생들이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만족하면서 돌아가셨고요. 대단한 부분이 아니더라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은 많은 것 같습니다.
진로 관련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는 학생들에게 졸업 후 진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2년 전까지는 저희가 취업박람회를 외부 업체와 공동으로 개최하기도 했고, 현재는 관련 박람회나 Post Doc 공고가 있을 때마다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는 식으로 진로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실 대학원생들의 행복이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행복은 추상적이고 딱히 정의하기 어려운 문제니까요. 그래도 월간 피자파티, 소모임 활동, 게임 대회 등을 통해 사람들간의 커뮤니티 활동을 독려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Q8. 대학원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행복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것들을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경제적 안정성, 연구 성과, 동료 관계, 사교 활동, 졸업, 학문적-인간적 성장 등이 대학원생의 감정상태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요인들 인 것 같습니다. 다만 본인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 저 개인에게 중요한 것들의 순서가 계속해서 변했거든요. 어제 중요해 보였던 것이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고, 어제 소홀히 했던 것이 오늘은 그렇게 소중해 보이기도 합니다. 많은 영역에 대해 최소한의 균형을 유지하는 채로 가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내일은 무엇을 원할 지 모르니까요.
저희 자치회는 대학원생들을 조금 더 행복하게 하고, 불필요한 소외와 불편을 최소화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웃고 즐길 수 있는게 우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요. 다만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같습니다. 학문적 성취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슬프고 불행한 날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날들도 분명히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에 기여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The years of anxious searching in the dark, with their intense longing, their alteration of confidence and exhaustion and final emergence into light -- only those who experienced it can understand”. 대학원에서 연구하는 과정이 본질적으로 불안, 초조, 정신적 피로함을 수반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모든 것이 모습을 나타내는 때에는 분명히 연구, 삶에서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라는 활동은 본질적으로 고독과 불안을 수반하기에, 대학원은 사람이 불행의 수렁에 빠지기 아주 쉬운 곳이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연구와 진로를 위해서라도 행복해지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대학원에서 행복, 교류, 공부, 연구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공부를 하는 동료가 생기는 것은 즐거운 일인 동시에 새로운 배움과 연구의 가능성이 생겨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같은 과의 연구실들은 서로 활동 반경이 비슷하고, 내용은 달라도 조금씩 겹치는 연구를 하기에, 교류의 시너지가 훨씬 커질 것이다. 그런데 대학원에는 보통 어떤 구심점이 없고, 구성원들의 소속감도 약해서 공동체가 쉽게 형성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 생명과학부 대학원 자치회는 훌륭한 모범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 대학원에서 함께 행복하고 성장하기를 도모하는 자치회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대학원에서 홀로, 또 같이 행복해지고자 몸부림치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이미지 제공 :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대학원 자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