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말에 대하여
적어도 나의 경우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건, 내 사랑의 주체는 언제나 명확히, 나 자신이다.
누군가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것들은 어쨌든 그가 가진 성격이나 특징,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 사람의 물리적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어느날 상대의 성격이나 취향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려도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것은 상대의 결점까지도 사랑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도 동의할 수 없다. 밥알을 자주 흘리는 것이 귀엽다거나, 덤벙대는 모습까지도 사랑스럽다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결점이라 부를만한 것들은 사랑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애인이 습관적으로 약속 시간에 늦거나, 타인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자신의 충동이나 감정기복을 정제하지 않은 채 쏟아내는 모습조차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도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 - 이쪽이 더 흔한 경우일 것이다 - 이라 이야기하겠다.
물론 결점이 없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여러 특징과 사랑스러운 점들과 트라우마와 끔찍한 결점들이 뒤섞인 하나의 총체로서의 상대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상대 자체를 사랑하라는 격언은 모든 것을 뭉뚱그리고 책임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만들어 우리가 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만든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고 싶다’는 넋두리는 공허하다. 그보다는 내가 어떻게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 살아온 삶과 다른 성격과 다른 능력이 있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에 기뻐해줄 사람을 찾고 싶은’ 것이다. 애인이 내게 선물을 주거나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보다도 더 기분좋은 일은, 내 덕분에 행복하다고 말해줄 때다.
영화 <노팅 힐>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안나(줄리아 로버츠)가 윌리엄(휴 그랜트)의 서점에 다시 찾아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과 대사는 따로 있다. 유명한 여배우인 안나가 평범한 서점 주인인 윌리엄의 집에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낸 기자들이 집 앞에 몰려들어 안나가 패닉에 빠졌을 때, 윌리엄은 이 일도 금방 잊혀질 거라고 안나를 계속 위로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잔뜩 몰려든 문 밖으로 나서기 전 안나는, 자신이 여기 온 것을 영원히 후회할 거라 말한다. 그때 윌리엄이 대답한다.
“I will feel the opposite, … always be glad that you came to stay.”
나는 당신이 왔었다는 걸 언제나 기쁘게 생각할 거예요.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대답인가. 어쨌든 당신 덕분에 나는 행복했다니. 하지만 여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하며 살아간다. 세속적인 인정 욕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거나,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계속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 덕분에 내가 행복했다는 말은, 상대를 행복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에 상대가 기뻐해야 하고, 동시에 상대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어렵지만, 풍부한 인생을 산 사람일수록 사랑이 조금은 더 쉬워질 거라 생각한다. 나의 세계가 넓을수록 그 안에서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도, 상대가 줄 수 있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도 높을 테니까. 어쨌거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