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eon Jul 26. 2020

사랑의 조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말에 대하여

    적어도 나의 경우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건, 내 사랑의 주체는 언제나 명확히, 나 자신이다.


    누군가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것들은 어쨌든 그가 가진 성격이나 특징,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나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 사람의 물리적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어느날 상대의 성격이나 취향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려도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것은 상대의 결점까지도 사랑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도 동의할 수 없다. 밥알을 자주 흘리는 것이 귀엽다거나, 덤벙대는 모습까지도 사랑스럽다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결점이라 부를만한 것들은 사랑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애인이 습관적으로 약속 시간에 늦거나, 타인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자신의 충동이나 감정기복을 정제하지 않은 채 쏟아내는 모습조차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도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 - 이쪽이 더 흔한 경우일 것이다 - 이라 이야기하겠다. 


    물론 결점이 없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여러 특징과 사랑스러운 점들과 트라우마와 끔찍한 결점들이 뒤섞인 하나의 총체로서의 상대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상대 자체를 사랑하라는 격언은 모든 것을 뭉뚱그리고 책임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만들어 우리가 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만든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고 싶다’는 넋두리는 공허하다. 그보다는 내가 어떻게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 살아온 삶과 다른 성격과 다른 능력이 있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에 기뻐해줄 사람을 찾고 싶은’ 것이다. 애인이 내게 선물을 주거나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보다도 더 기분좋은 일은, 내 덕분에 행복하다고 말해줄 때다. 


    영화 <노팅 힐>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안나(줄리아 로버츠)가 윌리엄(휴 그랜트)의 서점에 다시 찾아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과 대사는 따로 있다. 유명한 여배우인 안나가 평범한 서점 주인인 윌리엄의 집에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낸 기자들이 집 앞에 몰려들어 안나가 패닉에 빠졌을 때, 윌리엄은 이 일도 금방 잊혀질 거라고 안나를 계속 위로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잔뜩 몰려든 문 밖으로 나서기 전 안나는, 자신이 여기 온 것을 영원히 후회할 거라 말한다. 그때 윌리엄이 대답한다.


“I will feel the opposite, … always be glad that you came to stay.”
나는 당신이 왔었다는 걸 언제나 기쁘게 생각할 거예요.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대답인가. 어쨌든 당신 덕분에 나는 행복했다니. 하지만 여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다. 


<Notting Hill>, 1999.


    우리는 모두 타인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하며 살아간다. 세속적인 인정 욕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거나,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계속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 덕분에 내가 행복했다는 말은, 상대를 행복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에 상대가 기뻐해야 하고, 동시에 상대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어렵지만, 풍부한 인생을 산 사람일수록 사랑이 조금은 더 쉬워질 거라 생각한다. 나의 세계가 넓을수록 그 안에서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도, 상대가 줄 수 있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도 높을 테니까. 어쨌거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작가의 이전글 일상 갑질과 주인의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