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차 교사의 교육전문직 도전
1. 스토리텔링 자기소개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한 가장 크고,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후회 없는 일은 육 남매를 낳아서 기른 일이다” 평소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입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아들 하나에 딸 다섯을 낳아 기르며 초등학교 문턱조차 가보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육 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내셨지요. 누구보다 교육열이 높으셨기에 자녀 중에 교사가 세 명입니다. 딸이 많아서 일까요? 아니면 아들이 하나여서 일까요? 부족했던 남자 일손을 돕기 위해 아빠 일을 도우며 아들처럼 키워졌습니다. 어린 시절 창고에서 펑크가 난 자전거 바퀴를 때우던 일이며, 소를 먹이려고 풀을 베러 다니던 일이며, 외양간에 모깃불을 피우면 소가 그 큰 눈으로 나를 꿈뻑꿈뻑 쳐다보던 일이며, 들판에서 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보던 빨간 저녁 놀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장학사랑 함께 온 줄 알았어요.” 제가 장수 산서고등학교에 발령 나서 가는 첫날 아버지께서 양복을 차려입고 함께 가셨었지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어요. 아빠와 함께 온 어린 선생님이라니… 그래서 다들 장학사랑 함께 왔다고 생각했었대요. 저는 지금도 얼굴이 빨개져요. 지금까지 교사 생활하면서 새내기 선생님들 중에 아빠랑 함께 와서 교장실에서 인사하는 선생님을 본 적이 없거든요.
산서에 와서 여름 내내 여치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안도현의 여치 中에서-
안도현 시인이 마지막으로 재직했던 학교 산서고등학교. 누구는 교직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되고, 그의 사직서는 곧 저의 발령장이 되어 날아왔지요. 산서고에서의 첫 시작은 설레고, 열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산서에서는 우리 반 학생인 경희네 집에서 하숙을 했고, 프라이드를 타고 다니며 산서면 동화리, 신창리, 오산리, 계월리, 봉서리, 쌍계리, 이룡리, 건지리 아이들과 함께 밤늦도록 그루터기란 문학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했지요. 아이들과 함께 대본을 써서 연극 연습을 하고, 시화전을 준비하고, 분식을 시켜 먹고, 인형극을 했었습니다. 깔깔거리고 웃던 그때의 친구들 중 서넛은 저보다 먼저 시집을 가고, 아이 엄마가 되었습니다.
“달님도 사랑을 한답뎌?” 달 밝은 밤에 그가 제게 보낸 첫 메시지입니다. 굳이 달님을 빌리지 않아도 그의 눈빛에는 사랑이 쏟아지고 있었지요. 산서고 졸업식 뒤풀이에서 만난 안도현의 후배 시인인 남편은 그날 제가 입고 있었던 빨간 롱코트를 빨간 너구리 같았다고 기억하더군요. 산서를 떠나 군산으로 오던 날, 첫 학교, 첫 아이들과 이별하고 아직 애인인 그이의 어깨가 축축하도록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의 디딤 영상입니다. 잘 보고 코넬식 노트에 필기해 오세요. 20명 이상이 시청하면 선생님이 추파춥스를 쏠게요.” 지금의 저는 아이들과 거꾸로 수업을 진행하면서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4년 전까지 저는 교사는 완벽한 무대 위의 연출자, 혹은 배우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 내가 요약해 주는 요약정리, 내가 쉽게 외울 수 있도록 만든 암기법, 내가 설명하는 내용의 간결성과 정확성 이런 것들이 모여서 우수한 수업, 확실한 성적 상승, 훌륭한 교사 뭐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야, 이현주!! 너는 국어 시간마다 조냐?” 졸 때는 목을 뒤로 젖히고 조는 습관 때문에 서서, 졸고 있는 저를 내려다보시던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얼굴이 스칩니다. 저는 그때마다 다짐했지요. ‘난 국어 선생님이 될 거고, 절대로 내 수업 시간은 졸리지 않게 할 거야.’ 그런데 그동안은 한 번도 심각하다고 느끼지 못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제 수업 시간에 졸고 있는 아이들을 제가 발견한 거지요. 뭐지? 왜 내 수업 시간에 졸지? 내 수업이 그렇게 재미가 없나?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 이런 고민들 속에서 협동학습, 거꾸로 수업, 질문이 있는 수업 등을 섞어서 저 나름의 수업 모델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선생님 저는 이걸 잘 모르겠어요.” 국어 교과서 검정 위원이 되어 합숙할 때 모 대학의 유명한 교수님께서 제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애써 검정 위원들과의 수준을 맞추며 모르는 것도 분위기 맞춰 아는 척하고, 눈치 봐서 웃곤 하는 저에게 현장에 계신 선생님이 제일 잘 아실 것 같다며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모르는 걸 물어보는 그 교수님을 보고 저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 모르는 걸 물어볼 줄 알아야 제대로 알게 되는 거구나. 모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구나.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 거구나.’ 그 뒤로 저는 아이들에게 늘 이 일화를 말해 줍니다. 모르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서로에게 질문을 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하고요.
‘나는 과연 어떤 교사인가?’ 이게 요즘 제가 저에게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우연하게 인권센터에서 학생자치 설명서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권이란 화두를 접하게 되었지요. 그동안의 저는 학생을 교사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일에 서툴렀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했고, 바른길로 이끌어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 제가 선택한 방법들은 인권우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죠. ‘교육적’이라는 명목 속에 가려지고 감춰진 것들을 보려 하지 않았죠. 인권센터를 드나들수록 우린 얼마나 ‘말’과 ‘행동’과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 아이들을 대하는 게, 말하는 게, 눈길을 주는 게 얼마나 조심스러운가?를 고민하게 합니다.
“혹시 예전부터 승진하고 싶었던 거 아냐?”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장학사가 온다고 교실 바닥을 병으로 문지르고 유리창을 닦았습니다. 교감이었던 1학년 담임 선생님은 폭력적인 행동을 가끔 했었습니다. 공부를 정말 많이 잘 가르쳐 주었지만 그 열정에 따르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체벌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의무가 가득한 청소 시간, 유리창에 올라앉아 유리를 닦다가 장학사가 올 때까지 미처 못 내려왔습니다. 무서울 줄 알았던 장학사가 복도를 지나면서 저를 살포시 안아서 내려 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르죠. 그때 이 도전에 대한 씨앗이 뿌려졌을지도 모릅니다.
**이글은 전문직에 도전하면서 쓴 자기소개서를 조금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