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씨는 길명이네 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생각했다. 도대체 길명이에게 무슨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태권이가 정말로 이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일까? 길명이와 늦도록 아니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싶었으나 이상용 씨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동네에 난 소문대로 세권이 각시가 쭈뼛쭈뼛 거리며 길명이네 집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길명이는 쑥스러운 듯 일어서며 이상용 씨의 눈치를 살폈다.
"아짐씨가 이 시간에 여긴 왠일이대요?"
"아~니 이장 양반이 계신 지 몰랐구먼요. 이~~ 아까 회관에 갔더니 태권이 아들이 동네 어르신 들 드시라고 사과 세 상자랑 막걸리, 돼지고기 몇 근을 두고 갓길래. 좀 맛 좀 보시라고 가져 왔는디요"
이건 무슨 말인가? 이상용 씨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눈에 초점을 잃었다.
길명이의 말에 의하면 동네 사람들이 이장으로 추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태권이다.
태권이로 말할 것 같으면 아들만 둘이다. 하나는 공부를 동네서 손꼽을 정도로 잘해서 서울서 유명한 데인 김뭔장이라는 곳에서 변호사를 한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다음 날 동네서 돼지를 잡았다. 돼지 한 마리를 트럭에다 싣고 동네로 와서는 동네 전체에 돼지 멕 따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고, 생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모여서 시뻘건 돼지 간을 잘라서 맛있게 노나 먹었다. 돼지를 한 마리 잡았으니 동네 회관에서 며칠을 모여서 돼지 수육이며, 돼지고기 두부 김치찌개며, 돼지 족발 등을 나눠 먹었고, 그것도 너무 많아서 집집마다 고기 한 두 근씩을 싸서 가져다 먹었다. 동네 골목에 걸린 '자랑스러운 수선리의 박태권 첫째 아들 변호사 시험 합격'이란 플래카드가 오래오래 찢어질 때까지 동네 어귀에 걸려있었던 건 이 읍내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상용 씨의 아들이 변호사가 된 것도 아닌데 이상용 씨도 기뻤다. 동네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든든한 변호사가 동네에 있으니 걱정할 건 또 무엇이랴. 든든하고 든든하고 내 자식인양 자랑스러워 어깨를 으쓱하고 다니다가 타 동네 이장을 만나기라도 하면 우리 동네에 변호사 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태권이 둘째 아들은 공부가 서툴렀다. 동네서 맨날 사고만 치고 다녔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상용 씨의 셋째 딸 이보름 씨는 공부를 제법 잘 했다. 태어날 때부터 주먹 한 하게 태어나서 사람노릇 못하고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딸이다. 그런데다 위로 딸 둘을 낳고 또 딸을 낳아서 세 번째니 그리 귀할 것도 없는 딸이다. 이상용 씨는 아들이 필요했다. 힘써 일해 줄 노동력이 필요한데 기지배들만 내리 낳은 여편네 때문에 화가 나 있기도 했다. 그런 이보름 씨가 사람 노릇 못할 정도로 시원치 않게 태어났으니 속으로는 죽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내방 쳐두고 기다렸는데 2년이 지나도록 잘 살아냈고, 그다음으로 딸이 하나 더 태어났다. 새로운 아이가 태어났으니 출생신고를 더 미룰 수도 없고 그런 이유로 이상용 씨는 이보름 씨의 출생신고를 2년이 지난 후에야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상용 씨만 그런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식의 출생 신고를 1~2년 늦게 하였는데 그건 흠도 아니었다.
이상용 씨의 셋째 딸 이보름 씨가 공부를 아니 글짓기를 제법 잘해서 금메달을 받는 적이 있다. 안방에 금메달을 걸어놓고 다들 성당에 다녀왔는데 그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금메달을 훔쳐갔다. 그런데 그 메달이 태권이 둘째 아들이 진짜 금인 줄 알고 와서 훔쳐 간 거였다. 팔아먹으려고 갔는데 가짜 금이라서 못 팔아먹고 버리고 왔단다. 이 동네에는 숨길 수 있는 일들이 없었다. 태권이의 둘째 아들이 손이 거칠고 도벽이 있다는 소문은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라서 중요하거나 비싼 물건이 있으면 잘 숨겨 놓았다. 자랑하거나 보이는 곳에 둘 경우 태권이 둘째 아들이 다 훔쳐다 팔아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둘째 아들이 커서는 술장사를 했다. 막걸리 장사를 했는데 막걸리가 불티나게 팔렸다. 공장을 증축하고 군산시를 넘어서 전라북도 전체에 막걸리를 납품하는 대기업의 사장님이 된 것이다.
태권이 아들 덕에 마을 회관에는 막걸리가 끊이지 않았다. 막걸리를 가져다 놓을 때는 꼭 돼지고기도 함께 사다 준다.
'난 놈이다. 그놈은' 그렇게 생각하며 달게 막걸리 병나발을 불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막걸리 맛이 예전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