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100원짜리 새우 브로치를 추억하며)
“지혜야, 울지 마. 새우가 슬퍼하잖아.”
갓 서른을 넘은 엄마가 나를 달래며 했던 말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다섯 살쯤이었던 것 같다. 작고 예민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울었는데, 저 날은 동네 뽑기 통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문방구 앞 뽑기 통에 100원을 넣고 레버를 돌리면 동그란 통에 담긴 액세서리가 나왔다. 뽑고 보니 내 건 새우 모양의 브로치였다.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평소 내가 부러워하던 아이는 귀걸이를 뽑았는데 그게 그렇게 예뻐 보이고 샘이 났던 것이다.
왜 쟤는 귀걸이인데 나는 새우 브로치일까 생각했다. 진지하게. 그래봤자 같은 뽑기 통에서 나온 100원짜리인 것을… 그리고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 많은 나이가 되었다.
이 나이를 먹고도 나는 종종 질투에 휩싸인다. 그때마다 내가 하는 생각과 질문에 대해 적어본다. 그러면서 진지하게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달래본다. 훗날 팔십이 되어서도 요양원의 다른 노인들을 질투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첫째, 나를 우리 집 강아지에 대입해본다.
우리 강아지 나대오는 한쪽 폐가 없는데도 마냥 활발하고 작은 간식 하나에도 행복해한다.
대오는 다른 강아지가 해외여행 갔다고, SNS 팔로워가 많다고, 부자 주인과 산다고, 강아지 유치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의 산책과 간식을 즐길 뿐이다.
물론 인간은 강아지가 아니다. 하지만 저 우주에서 보면 인간이나 강아지나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둘째,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내 영혼에 그 경험이 필요했는가?”
타인의 성과와 경험을 보며 나 자신을 초라하게 느낄 때 나는 그 내가 그 사람이 되었다고 상상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의외로 그렇지 않다는 답이 나온다. 내게는 나에게 필요한 경험만이 주어진다는 믿음. 내 일이 아닌 것에는 설렘도 열정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되새긴다. 내 것이 아니었기에 내게 오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사람들은 남에 대해 잘 모른다. 아예 관심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부분일지도) 나 자신에 대해서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속속들이 경험해왔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외출할 때 씻고 화장하고 좋은 옷을 입듯이, 사람들은 남에게 자신의 초라한 속내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내가 보는 건 꾸며진 그 사람의 모습이거나, 인생의 좋은 운을 만나 가장 잘 나갈 때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인생은 매우 길다. 나 자신에게도 좋은 계절이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좋은 계절이 왔는데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셋째, 나는 주입식 사고방식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생각해본다.
나이가 어려야, 예뻐야, 성적이 좋아야, 좋은 대학을 가야, 재산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우리 사회는 늘 주입한다. 각종 광고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이유와 같달까. 장사들을 해야 하니 ‘너는 부족해. 그러니 이것이 있어야 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발신한다. 우리 부모님들도 그 메시지의 피해자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속세가 그런 고정관념에 집단 속앓이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넷째, 내 몸 컨디션은 어떤가.
어제 잘 잤는가? 잠을 설쳐서 컨디션이 나쁘진 않은지, 걷기 운동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지? 그렇게 돌이키다 보면 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감정의 원인이 다름 아닌 몸의 컨디션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때론 아무 생각 없이 푹 자는 것도 필요하다.
누군가는 질투를 낮은 에너지에서 기인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낮은 에너지에서 허덕일 때도 있기 마련이다.
질투는 마음이 허기질 때 찾아오는 감정이다. 배고플 때 남 먹는 거 보면 부럽고 먹고 싶어지는 건 인간의 본능 아닐까?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마음이 왜 허기지는지에 대해 고찰해봐야 할 것이다.
추억 속 100원 짜리 새우 브로치를 떠올려본다. 사실 새우모양 브로치라니, 나름 희소성 있고 귀엽지 않은가! 하찮게 여겨서 한 번도 안하고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나의 새우 브로치. 앞으로는 남의 귀걸이보다는 나의 새우 브로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