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창문이 여러 개로 나누어진 1인 자리에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벌레 한 마리가 앞의 막혀있는 유리창문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창문과 창문 사이에 작은 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벽 바로 옆에는 큰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벌레에게 그 큰 창문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작은 틀이지만 그에게는 엄청 높은 벽처럼 느껴졌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바깥이 보이는 유리창문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벌레를 보며 뒤로 조금만 더 와서 보면 또 다른 출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내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면 직접 보진 않더라도, 그 벽을 넘어본다면 또 다른 나갈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했지만 벌레는 한동안 밖이 보이고 출구는 없는 그곳에서 맴돌 뿐이었다. 난 안타까웠지만 어쩌면 한편으로는 우리들 삶과 저 벌레가 처한 상황은 정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 벌레와 같은 입장이고 벌레를 지켜보고 있는 미지의 존재가 있었다면? 그 미지의 존재도 내가 벌레를 도와주지 못한 것처럼 나를 도와주지 못한다면 결국 그 길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스스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있는 곳 외의 상황을 지금의 기술로 직접적으로는 볼 수가 없다. 물론 세상이 좋아져 미디어로는 볼 수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직접 느끼고 실존하는 3차원의 현실세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단면을 보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의 시야는 그만큼 작아서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전부 같지만 사실 우리가 당장에 겪고 당장에 보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이고 단편적인 것들 뿐이다.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없다. 시간도 공간도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처럼 4차원의 세계에서 단면만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보다 넓고 무한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젠간 나도 그것만이 길이라 생각하고 목표라 설정하고 실패했을 때 너무 괴롭고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 생각의 전환을 했을 때, 나를 비추고 있던 생각의 조명을 다른 색으로 스위치만 누르며 바꾸게 되었을 때, 너무 신기하게도 삶이 갑자기 밝아지고 달라 보였다. 그 전까진 어두컴컴하고 갇혀있는 것만 같았던 상황이 갑자기 탁 트인 것 같고 아름다운 색으로 변했다.
결국 내가 느낀 건 삶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은 시야를 넓혀 내가 아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느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며 그저 단면이고 한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생각의 조명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문제에 대하여 행동하지 않던지,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던지 세상은 분명 다른 색과 길로 보일 것이다.
그 생각의 조명을 아까 말한 벌레에 비유하자면 어쩌면 나가지 않고서도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나 옆의 창문으로 나가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막혀있는 창문만으로 나가려 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 핵심이다.
인생은 선택과 길 찾기의 연속이다. 어떤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우리는 한 가지 방법에만 집착하거나 한 가지 생각에만 잡혀서 좌절하고 희망을 잃는다.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 말고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거나 이 시간이 영원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시간이던 공간이던 그 상황의 단면만 볼뿐이고 우리가 아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뒤로 와서 관찰자처럼 바라보자. 분명 길은 존재하고 그것이 우리가 고수하던 방식이 전부가 아니며 생각을 조금만 전환한다면 바로 옆에 길이 있을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