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순한 물음이, 잠자고 있던 나의 욕망을 건드렸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는데 누군가 그렇게 말을 걸었다.
"아... 그냥 책 읽는 거 좋아해요"라고 얼버무리고 가는데 그 물음이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돈다.
음, 나 이거 꽤 하고 싶은 모양인데. 스스로 생각했다.
요즘 같은 시대는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지만, 생각과 글이 '책'으로 묶일만한 콘텐츠가 쌓였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책을 낸다는 것은 꾸준함과 어떤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을 담보한다. 그렇기에 책을 한 권 낸 작가라 해도 읽고 쓰기만 한 사람과 분명히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무언가는 써야 하나의 주제로 묶이고 서사도 생기고, 나름의 구성도 생길 텐데 작가가 되기에 가장 어려운 관문은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매일, 많은 유혹을 버리고 앉아 노트북을 펼치는 습관.
처음엔 다른 하고 싶은 것들을 다 제쳐두고 (다소 억지로) 글쓰기에 몰입해야 한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이 전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고, 글쓰기는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공식이 마음속에 이미 생겨버린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주로 아주 수동적으로 쉬는 행위를 말한다. 그저 널브러져 있고 싶고, 유튜브나 보고 싶고, 남들 뭐 하나 피드로 확인하고 싶고, 좋아하는 책들을 읽으며 작가들이 책을 통해 연구하는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먹고 싶은, 그런 것들이다.
이 수동적인 에너지를 글을 쓰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데에는 대단한 변화를 필요로 한다. 일단은 내가 모든 것을 제쳐두고 글을 "써야 한다"는 전제를 바꿔야 했다.
자신을 돌이켜 보니,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나는 혐오하고 있었다. 핸드폰 보기, 시간 때우기, 수동적으로 책 읽기 이 모든 것은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나는 이 것들로부터의 완벽한 차단을 오히려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좀 더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쓰기라는 행위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시간을 보고 또 보고 싶은 미술 작품처럼, 탐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을 애정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해야 할 것"이 아닌 "정말로, 진정으로 원하는" 시간으로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 잡아 두었다.
공간도 그렇게 만들었다. 가장 빛이 잘 들고, 새소리가 들리고 자연 풍경이 보이며, 가능한 '살림'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간. 책상 위에는 책 한 권도 두지 않고, 마치 내가 와서 앉아 채워주기를 바라는 그런 자리를 만들었다. 다른 일로 바빠 그 자리에 앉지 못할 때도, "오늘 몇 시면 저 자리에 앉을 수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공간.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내 머릿속에 전제로 깔아 두니, 오히려 핸드폰으로부터, 넷플릭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써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쓰고 싶다"로 바꾸는 순간, 쓰는 것은 습관이 되기 더 쉽다.
쓰는 것이 습관이 되고, 그 시간이 나의 일상에서 가장 달콤한 시간이 될 때, 이제 하나의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그 이후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기대되고, 설레는 지금의 마음을, '마침내, 퇴고'라는 고난의 여정의 순간에 끄집어내고 싶다.
사실 '작가'라는 타이틀은 책 한 권 냈다고 스스로를 그렇게 칭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진 단어다.
영어의 "writer", "쓰는 사람"보다 갖고 있는 아우라가 크다. "쓰는 사람"과 "작가"사이의 간극은 "유튜브 크리에이터"와 "예술가"만큼이나 먼 느낌이다.
그래서 운 좋게 책을 한 두권 냈다 해서, 스스로를 자신감 있게, "네, 작가입니다"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저 지금은, "쓰는 사람"이면 족하다. 음악가 릭 루빈은 말한다. "예술의 목표는 완벽함을 얻는 게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른 이들에게 공유하는 것이다"라고. 모든 예술은 섬세하게 보고 충실한 순간을 살아내며, 에너지를 집중해서 오늘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한 것에서 출발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