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이 한 해를 돌아보고 정리할 마음의 여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현시점. 불안함과 부정적인 감정들로 과부하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올해 나에게 의미 있었던 한 마디를 생각해 본다. 요즘 계속 떠오르는 한 문장은
노벨문학상 수장자로 지목된 한강의 첫 전화 인터뷰에서 언급한 첫마디. “아들과 저녁 식사 중이었습니다”라는 말 이었다.
한강은 이 말을 영어로 대답하고 놀랐다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놀란 기색 없이 덤덤히 전하는 목소리에서 그녀의 평온한 저녁시간이 그려졌다. 서촌의 고즈넉한 집에서 아들과 고요히 차를 마시며 자축하는 모습도. 노벨문학상에도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쌓아 올린 그의 일상이 엿보이기도 했다.
왜 지금, 한강의 이 말이 계속 떠오르는 가, 생각해 보았다.
계엄령이 발표된 그날, 우리는 모두 가족과 혹은 혼자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잘 준비를 하며 일상적인 하루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따뜻하고 즐거운 저녁 식사를 했었다. 아이들은 꺄르륵 거리며 놀고, 나는 좋아하는 언니와 차를 마시며 사는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의 “계엄을 선포합니다”라는 한 마디는 이 모든 평화로운 일상을 한 순간에 불안과 공포, 끝없는 걱정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어 버렸다. 그날 이후로 지인의 집에서 보냈던 순간들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지금 모두가 자기가 살던 일상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시시각각 변하는 뉴스에 정신이 팔리고, 새벽에도 깨어서 뉴스 속보를 먼저 확인한다. 비상계엄도, 독재정권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왜 이렇게 사시나무 떨듯 두려워하는 가, 스스로 반문해 보았다.
12월 6일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 박물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강 작가는, “문학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깊게 파고 들어가는 행위”라고 했다. 독재정권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문학을 통해서나마 그 시대상황에 아무 힘없는 ‘소년’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상의 평화가 침해받는 요즘,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나의 일상을 지켜낼만한 올곧은 일상적 루틴이랄까, 정신력을 가지지 못한 나를 자책하면서 한강 작가는 어떻게 자신의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을까 궁금해서 기자회견 전문을 자세히 보았다.
작가는 작품에서처럼 이번 상황에서도 시민들과 대치하는 소극적인 군인들의 행동에서, 그리고 그런 군인들을 맨몸으로 막아내고 껴안으며 제지하고 마침내 퇴거할 때 잘 가라고, 아들을 대하듯 인사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희망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기자회견을 마쳤다.
가장 참담한 상황을 그려내면서도 가장 맑은 순수한 결정체로 희망을 제시하고 있는 그의 문학에서처럼, 그는 2024년에도 반복된 초현실적인 계엄령, 그리고 불안한 상황들 속에서 무장한 군인을 온몸으로 가로막은 시민들에게서,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부하 군인에게 지시하는 소극적인 군인들의 행동에서 희망을 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편안하게 다시 글을 쓸 준비가 되었다는 작가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을 눈이 벌게져서 따라가기보다는 나의 단단한 일상을 갖추고 민주 시민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담담하게 해 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앞으로의 평화로운 저녁식사시간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