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진_02
“봄이 되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고흐의 아몬드 나무가 생각납니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Almond Blossom
봄이 소리도 없이 찾아왔다. 가는 곳마다 나무에는 꽃봉오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기세로 한껏 웅크리고 있다. 봄이 되면 한국에는 꽃이 만개를 한다. 꽃의 종류도 참 많다. 보통 3월이면 꽃이 개화를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그중 벚꽃 축제를 가장 즐긴다. 벚꽃은 봄의 순결, 처녀의 상징 또는 절세미인이라는 의미가 있고, 일본에서는 부와 번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꽃마다 꽃말의 의미가 다 있지만 봄의 꽃은 모두 희망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꽃 피는 봄이 오면 절로 고흐 생각이 난다. 특히 매화꽃은 고흐의 아몬드 나무와 많이 닮아 있다. 그가 그린 꽃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느껴진 그림이 ‘아몬드꽃’이다. 강렬한 햇살 아래 꽃나무를 보고 있으면 고흐처럼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다 품어 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빈센트 반 고흐, <꽃 피는 아몬드 나무>, 73.5 x 92cm, 캔버스에 유채, 1890, 반 고흐 미술관 소장
<꽃 피는 아몬드 나무>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그의 동생 테오의 아들이 태어날 때 그린 작품이다. 생 레미 시절 고흐가 조카의 탄생 소식을 듣고 축하 선물로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색 아몬드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뭇가지 그림이다.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듯 봄에 피어나는 아몬드꽃은 희망을 연상케 한다. 그를 항상 후원해 주고 든든한 친구가 되어준 테오에게 예쁜 아들이 태어났다는 편지를 받고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테오는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고흐 성을 따라 ‘빈센트 빌렘 반 고흐’라고 지었다. 고흐는 남프랑스에서 가장 일찍 피는 꽃들 중 하나인 아몬드꽃을 그려서 조카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 봄의 꽃은 고흐에겐 마지막 봄의 꽃이 되고 말았다.
당시 꽃 피는 아몬드 나무 연작에 관심을 가졌던 고흐는 더 이상 세부적인 형태에 연연하지 않았다. 꽃들의 싱그러운 피어남과 하늘의 높고 푸른 그 자체를 자연스럽게 캔버스 위에 옮겨 놓았다. 아몬드꽃이 솜처럼 보송보송하게 움트면서 탐스럽게 피어나는 모습은 고흐에게 눈부신 희망과 소생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몬드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음미하고 그림으로 묘사하며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찾았을 것이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그림 속에서 꽃송이들은 마치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자유롭게 보인다. 이 그림에서는 눈부신 여유와 자연스러움이 한껏 느껴진다.
고흐의 아몬드 나무는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그는 일본 판화에 관심이 많았다. 우키요에로 불린 일본 판화는 서민을 위한 값싼 목판화로, 18세기 말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했고, 1876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우타가와파의 작품이 대량 출품되면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단순한 형태의 일본 판화는 특히 인상파에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묘한 시각과 대담한 색채로 큰 영향을 미쳤다. 고흐에게도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와 신선한 표현법을 낳는 계기가 되었고, 색채를 해방시키는 힘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이후 고흐에게는 소재보다 색채나 구도가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그 영향은 그가 더 이상 붓을 들 수 없을 때까지 이어졌다. (『내 친구 빈센트』 p.182 참조)
<꽃 피는 자두나무>. 왼쪽은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68)가 1857년에 발표한 원작(35x22cm), 오른쪽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1887년에 그린 모사작(55x46cm)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들 중 한 사람이 빈센트 반 고흐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흐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동생 테오와 고흐는 서로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형제애를 키워왔다. 그들의 편지만을 엮은 책도 있다. 동생 테오는 화방에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형에게 이젤과 물감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돈을 보냈고 나중에는 치료비까지 꼬박꼬박 보내줬다. 고흐가 그린 그림의 양이 많아지자 그림을 보관할 방까지 따로 구해주기도 했다. 테오는 금전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고흐가 화가의 꿈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는 응원과 지지를 함께 보내줬다. 그들의 우정과 사랑의 편지는 고흐가 세상과 결별한 후 테오의 아내 요한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흐가 자살하기 전까지 37년의 짧은 생을 돌아보면, 그림을 그린 시기는 10년이다. 그것은 1881-1883년의 헤이그 수련기와 1883-1885년의 드렌테와 누에넨의 성숙기, 1888-1890년의 완성기로 나눌 수 있다. 고흐의 삶은 마치 그림처럼 한 인간의 길과 성장, 모색, 방황, 해방, 회귀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 중에 마지막 완성기에 그린 <꽃 피는 아몬드 나무>는 굉장히 편안하고 안정적인 구도와 색을 지녔다.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888년 겨울 남프랑스 아를에서 동료 화가인 고갱과의 다툼 이후 정신병이 심해지면서 고흐는 이듬해 아를을 떠났다. 마지막 죽기 직전의 고흐는 상당히 불안했고 끝 모를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1889년 5월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에 입원한 고흐는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는데 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내적인 힘을 선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는 스스로 선택한 정신병원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내면의 투쟁으로 나날을 보낸다. 그곳에서 그는 1년 동안 150여 점의 유화를 그린다. 거의 이틀에 한 점씩 그렸는데 발작 증세가 심해질수록 더 열심히 그렸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과 싸우면서 마지막까지 창작의 혼을 불태웠다.
불행한 삶 속에서도 고흐는 끊임없이 사람들과 내면적인 교류를 꿈꾸며 소통하길 원했다. 그는 늘 화가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싶었으나 그 꿈은 좌절되고 만다. 그의 고독과 불행은 그 소박한 꿈에서 비롯되었을까?
인간 빈센트 반 고흐의 실패한 사랑을 되돌아보았다. 그가 절실히 원했던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 불타는 듯한 정열적인 그림들은 우리를 향해 소리친다. 진정으로 사랑했노라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고자 했던 그의 삶에 대한 희망이 테오와의 편지 속에 모두 녹아 있다. 그는 열심히 사랑했다. 오직 사랑 그 자체를 위해 예술을 창조했다. 그의 삶은 온통 실패였으나 상처로 빛나는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태양의 화가, 영혼의 화가라고 불리는 그는 죽어서도 우리의 가슴에 별로 기억될 것이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나는 천천히 그 꽃길을 걸으며 그를 그리워하고 싶다. 그가 원했던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무엇을 그토록 갈망했는지 떠올려볼까 한다. 그가 절실하게 희망했던 내면의 교류와 공동체의 삶을 생각하면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커뮤니티의 진정한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삶과 예술이 하나가 되었던 우리의 반 고흐는 영원히 꽃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참고문헌:
1. 『내 친구 빈센트』, 박홍규 지음, 소나무, 2006
2.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예담, 2005
“봄은 정말이지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계절인 것 같습니다.” - 이랑
현재 앤솔로진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