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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Nov 03. 2020

평범하지만 평균은 아닙니다.#01

덩치 큰 소심쟁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자이언트의 기운. 초등학교 입학할 때 키가 127센티였다. 나의 단짝이 104센티였으니 내가 얼마나 거구로 보였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어째서인지 기골이 장대한 나는 오빠보다 덩치가 커서 종종 누나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이언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뭔가 더 거대해진 시점은 맹장수술을 하고 나서였는데 정확히 수술 부작용이라고 하기도 뭐한 그냥 폭풍성장의 시기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후 1년에 7센티 몸무게는 8킬로 정도 꾸준히 늘었다.


나는 교우관계도 좋고 말발도 좋은 편이었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소풍 때마다 앞에 나가 춤을 추는 좀 웃기는 애. 그때만 해도 내가 개그우먼이 될 줄 알았다. 아빠도 내가 이영자 님만큼 유명한 개그우먼이 될 거라며 ‘엄지 척’ 해 주실 정도였다. (하필 대입을 앞에 두고 물 건너 마을에 코미디 학과가 유명한 대학교가 생겼다.) 이렇듯 어중간한 성적의 튀는 아이는 고입에 실패하고 만다. 누구도 나의 실패를 예견하지 못할 정도로 평범한 성적의 소유자였기에 나도 부모님도 선생님도 참 속이 쓰렸다. 여차 해서 읍내의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어디에나 있을 7 공주파의 언니들과도 나름 웃으며 인사하는 또 어중간 한 애가 되었다. 고입 떨어지거나 성적이 모자란 아이들 혹은 타지에서 문제를 일으켜 전학 온 학생이 주인 시골학교에서 평범한 나는 그래도 좀 머리가 되는 아이였다. 게다가 키며 덩치며 한자리 차지했는데 좀 어울리지 않는 문학소녀스러움과 무대 진행병 같은 게 있어서 여기저기 발표대회며 글짓기 대회에 나가 활약을 했다. 아침 조회시간에 소설’ 별’의 독후감을 연기와 함께 선보인 유일무이한 학생이었기에 똘기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뭔가 섞일 듯 섞이지 못하던 나는 같은 중학교에서 온 조금 노는 친구와 절친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기에 노는 무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내 고입시험에 저주를 퍼붓던 무리 중 하나였다. 1학년 어느 날 조회시간에 등나무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시시덕거리는데 한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애들아, 교장실이 어디니?”

나는 그만 눈물을 쏟으면서

“죄송해요, 다시는 안 먹을게요.”

친구들의 한심한 눈빛에 정신을 차리니 그냥 그분은 길을 물어보신 거였다. 세상 부끄럽고 멍청한 행동을 아이들은 두고두고 놀려먹었다.(조회시간에 독후감 발표한 일과 함께) 졸업한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놀린다.

평범함을 가장한 소심쟁이는 이 일을 계기로 조금 더 까져보기로 마음먹었다. 소풍 간 날에는 사복 입은 김에 술도 먹어보고 모르는 남자애들과 헌팅을 해보기도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하는 날에는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서 야영을 간다고 부모님을 속이고 3박4일  여자 7명이 캠핑을 한적도 있다. 대학생 오빠들을 꼬셔서 술도 뺏어 먹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캠핑 중에 신창원이 잡혔다는 역사적인 사건을 마주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흥이 넘치는 겉모습만을 보고 좋은 자리로 불러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교묘히 마음을 움직여 조종하기도 한다. (내가 정신을 번쩍 차린 계기이기도 하다.)  잘한다고 하면 더 열심히 하고 채찍질을 하면 도망가는 그런 류인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 속병을 앓는 성격이란걸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특별한 줄 알았던 10대와는 달리 20대엔 평범하고 싶었는데 평범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게다가 평범함을 유지하긴 더 어렵다. 어릴 때 꿈꾸던 특별한 삶이 이런 평범한 삶일지도 모르겠다.

능청과 대범함은 가면 혹은 연기였고 그렇게 받던 스트레스의 원인이 이 가면 때문이라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어떤 일에 칭찬을 받을 때면 그렇게 숨을 곳이 없나 찾게 된다. 칭찬의 답례를 어떻게 할지 몰라 얼굴이 벌게지거나 우물쭈물하던 일이 참 많다. ‘저돌적인 소심녀에겐 그냥 칭찬은 하지 마시고 월급이나 올려주세요.’라고 속으로 안절부절 하기 일쑤였다. 뭔가 칭찬받고 기대를 한 몸에 받기 시작하는 순간 스트레스가 깊숙이 들어와 도시락 까먹다 들켜도 울고 마는 찌질이가 튀어나와 내 발목을 자꾸 잡는 것이다.  


“해봄씨 얼마나 씩씩한지 몰라. 남자일도 거뜬하게 해내고”


뭔가 내 덩치에 소심함은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더 열심히 더 당차게 달리고 있었다. 인정을 받을수록 심리적 압박이 커서 도망치듯 이직을 하거나 휴식기를 가졌다. 이런 면모는 동호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분위기 메이커에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나를 중심으로 모임이 형성될 정도였으니 그 스트레스나 부담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나 회사와 다른 점은 내가 주도할 수 있다는 것. 내 스트레스의 원인들 <약속을 어긴다거나 분위기를 흐리는>을 모임에서 제거하며 모임을 유지했다. 그 당시 내 별명이 ‘미실’ 또는 ‘틀러’였다. 그럼에도 내 친구들은 나를 떠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모임을 이어 나갔다.

내가 나의 소심함을 인정했더라면 조금은 덜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범함을 연기한 덕분에 이 소심쟁이는 다양한 경험을 하고, 누군가 조언을 구하거나 의견을 내야 할 때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실한 답이 가능하다.


2019년 글쓰기 모임의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저는 40살부터는 예술가로 살 겁니다.”

다들 뜬금없는 자기소개에 웃으며 “뭐로?”라는 말로 되물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부끄러움, 서투름, 찌질한 본캐를 더욱 드러내기로 했다. 나이가 먹어 생긴 능청인지 소심함이 닳고 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가면을 쓸만한 일을 막기 위한 진짜 내 인생을 살기 위한 첫 포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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