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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행 Dec 09. 2019

그리운 지구의 저쪽

볼리비아 라파스

 ‘밤에 라파즈에 도착한 사람은 라파스를 떠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라파즈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잊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린 새벽 6시에 도착했는데도 라파스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인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

평균 고도 해발 3,600m가 넘는 고산지대라 라파스에선 부자들이 낮은 지역에 살고, 높은 곳엔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산소도 희박하게 느껴질 만큼 높은 곳에 있었다. 

라파스는 여행자들 사이에 '좋다'와 '싫다'가 분명하게 갈리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라파스의 매력에 빠져 확실히 ‘좋다’ 쪽으로 기운다.  

라파스 시내엔 식민지풍의 예쁜 박물관들이 즐비한 골목이 있고, 성당 뒷길 마녀 시장에선 온갖 약초와 주술적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줄무늬 바지와 야마 털 스웨터를 쌓아 놓고 파는 거리에선 어린 구두닦이들이 손님을 기다렸다. 


 라파스에 도착한 며칠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났던 힘센을 다시 만났다. 힘센이가 친구인 나다니엘과 시장에 가려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한국인인 나다니엘은 직장을 그만두고 남미 여행을 하다가 라파스에 6개월 동안 머물고 있었다. 

 나다니엘이 살고 있던 집은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근사한 집이었다. 현지인 친구의 부모님이 직장 때문에 이탈리아로 가게 되어 싸게 빌렸다고 했다. 시장에서 만난 인연으로 우리 가족은 이 집에서 일주일간 얹혀살았다.


  친구네 집에 놀러 온 것처럼 맛있는 것도 해 먹고  관광도 하던 중에  나다니엘의 이탈리아인 친구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자라기에 늘씬한 서양 아가씨를 상상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분위기 있는 독신 여성이었다.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왔다가 탱고가 좋아서 아예 아르헨티나에 살게 되었단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선 ‘일상’이란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눈 뜨자마자 ‘뭐 먹을까’라는 생각으로 아침부터 지지고 볶고 한상 가득 챙겨 먹는 우리 가족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가브리엘의 아침은 모카포트에서 끓여낸 커피 한 잔 뿐이었다.

싸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내면 화기애애하다가 햄버거라도 먹게 되면 불평을 쏟아내는 우리의 점심과 달리 가브리엘은 점심은 거의 먹지 않거나 나다니엘이 인스턴트 라면이라도 먹으면 아주 조금 나눠 먹었다.

우리가 저녁엔 뭐 해 먹을까 토론하고 장 보러 간 사이에 가브리엘은 샤워를 하고 탱고를 추는 곳인 밀롱가로 갔다.

‘저 사람 삶의 배경은 현실이 아니라 영화가 아닐까.’

하루는, 한국으로 소포를 부치러 라파즈 시내에 있는 우체국에 갔다. 스페인어 단어 몇 개와 손짓 발짓으로 겨우겨우 소포를 부치고 거리로 나왔더니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 생각에 허둥지둥 택시를 타고 집에 왔는데 다행히 자상한 나다니엘이 빨래를 걷어 놨다. 한숨 돌리고 정원에 내리는 비를 보다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열어놓은 부엌문 밖으론 시원한 비가 쏟아지는데 부엌에선 탱고 음악이 흐르고 식탁 한쪽엔 가브리엘이, 다른 한쪽엔 나다니엘이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낭만의 화신인양 탱고와 커피와 함께 생활하는데 같은 곳에 있어도, 동시에 여행하는 중이어도 우리 가족은 빨래 걱정을 하고 있구나.     


‘내가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라파스를 떠나자니 헤어지기 싫은 연인과 이별하는 느낌이다. 여긴 내 평생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 멀고도 먼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 라파스는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생각나는 이미지다. 

아름다운 여인 같은 라파스가 두고두고 그리울 것이다.

그리운 지구의 저쪽, 라파스.


알토시장에서 내려다본 시내


박물관 거리 

     

루이 암스트롱이 달과 비슷하다고 했던 '달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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