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바르셀로나엔 친구의 언니가 민박집을 운영하고 계셨고 아프리카에서 만났던 올가가 살고 있었다.
올가, 우리 가족 모두의 친구.
올가를 떠올리면 달리는 트럭 창문을 열고 빨래한 양말을 들고 말리던 모습, 오메가 6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물통을 배낭처럼 등에 매고 호스 같은 빨대로 물을 마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올가는 남미여행을 할 우리에겐 ‘지라파 까미난 레따(?)’라는 스페인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기린은 천천히 걷는다.’ 란 뜻이라는데 이 문장은 아르헨티나 동물원에서 기린을 보며 준이와 몇 번 되풀이했을 뿐, 도대체 써먹을 곳이 없었다.
아프리카 트럭킹여행에서 처음 만났을 때, 사과가 영어로 ‘애플(apple)’이라는 것도 모르는 서양인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본 나에게 올가의 영어실력은 충격이었다. 그런 영어실력으로 혼자 아프리카 여행을 왔을 정도니 올가의 씩씩함이란…
이글이글 타던 태양이 기운을 다 빼고 쉬러 가는 시간인 석양이 물들 때 운전사 겸 대장인 쏜은 그날의 여행과 다음 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바나 맥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아프리카 여행의 저녁 일상이었다. 설명이 끝난 후에 쏜은 영어가 안 되는 올가에게 다시 한번 천천히 설명을 했다.
올가와 같이 설거지하면서는 ‘너는 영어를 얼마 동안 배웠어?’하고 물었는데 올가가 이해하는 단어가 잉글리시(english) 뿐이었는지 ‘난 재작년에 엄마랑 런던에 갔었어.’란 대답이 돌아왔다. 황당했지만 그리 중요한 질문도 아니어서 런던을 화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지켜보던 남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왜 그러냐고 묻는 올가에게 이 상황을 영어와 손짓 발짓, 안 되는 스페인어까지 동원해서 설명해야 했다. 20여 일을 같이 생활하다 보니 이런 의사소통도 나름 익숙해져서 스페인에서의 생활, 한국 이야기 등, 의외로 깊은 대화도 가능했다. 여행 막바지엔 한국인 리아저씨와 격렬한 말다툼을 하면서 막힘없는 영어로 싸우는 놀라움을 보여 주기도 했다.
여행 중반쯤 어느 날, 오후 일정이 끝나도 여전히 팔팔한 준이와 놀아 주느라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고 있는데 올가가 오더니 엄마라서 힘들겠다며 내 칼을 대신 잡았다. 새로운 적을 만난 준이는 신나서 칼을 휘둘렀다. 숙명의 결투가 끝난 후에, 올가는 준이에게 오늘은 자기 텐트에서 같이 자고 엄마, 아빠에게 시간을 주자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트럭킹 여행이 끝나고 올가는 아프리카 북부로 올라가고 우리 가족은 남미로 떠났었다. 6개월 후에 바르셀로나에서 올가를 다시 만났을 땐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점점 남루한 여행자가 되어가는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은행원인 올가는 바르셀로나를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이었다. 민소매티에 반바지를 입고 아프리카 초원을 걷던 모습은 올가네 집 냉장고에 붙어 있는 사진 속에만 남아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엄청나게 향상된 올가의 영어실력이었다. 이젠 영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는데 개인 과외를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대화가 가능해지면서 올가가 아프리카에서 나눴던 대화의 3분의 1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드러났다. 웃으면서 아프리카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다시 해야 했다. 사실, 나도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어색하게 웃거나 대충 얼버무렸던 적이 많았으니 올가 탓을 할 처지는 못된다.
바르셀로나에서 올가와 시내 구경도 하고 유명한 식당에서 크림이 듬뿍 올라가 있는 핫초콜릿도 마셨다. 올가의 친구인 에바와도 즐거운 하루를 보냈고 올가의 영어선생님과 어머니와 함께 올가네 집 저녁초대도 받았다. 올가의 어머니는 영어는 못 하셔도 준이와 함께 물개 흉내를 내면서 웃는 유쾌한 분이었다.
스페인식 토르티야와 버터를 한 숟가락 띄운 차가운 크림수프, 토마토를 으깨 바르고 올리브유를 뿌린 바케트, 하몽과 칠면조 햄, 푸아그라, 디저트로 호두를 얹은 브라우니까지 먹고 나서 우리 가족은 올가 어머니께 한국 가서 스페인 식당 차리자고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여행에서 만났던 친구에게 며칠이나 시간을 내주는 건 성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 새삼 올가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날 또 한 명의 친구는 우리가 머물렀던 민박집 언니의 동생인 고등학교 때부터의 절친이었다. 아쉽게도 일정이 어긋나서 못 만났지만 언니에게서 친구의 최근 소식을 들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평생 간다고 하지만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젊은 시절엔 여유롭게 만나기가 힘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볼 기회가 없는 동안 ‘내 친구는 이렇게 살았었구나.’를 친구의 언니에게들으면서 나의 불성실함 때문에 좋은 친구들과 멀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인간관계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지치기를 하듯 점점 좁아진다는 이야기들을 하곤 했었다. 친구관계는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아서 잠깐 싫다고 바로 쳐버릴 것도 아니고 좋다고 한 번에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처음에 싫은 점이 발견돼도 지나고 나면 좋은 사람인 경우도 많았고 지낼수록 아닌 관계도 있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꾸어 갈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행 후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친구들과의 틈새를 메꾸려 노력했다. 가족과 더불어 내 노년을 함께 할 사람들은 친구들인 것 같다.
미국 삼촌댁에서 가족의 재발견을 했다면 바르셀로나에선 친구를 재발견했다.
동물을 좋아해 아프리카에서 사는 게 꿈이라던 올가는 일 년 후에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자세한 내막은 만나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프리카로 날아가지 않는 한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때 연애를 시작한 거 같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고등학교 때 친구는 진짜 연애를 시작했었고 지금도 잘 사귀고 있으며 내 절친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