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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엘 Mar 12. 2024

여대생이라고 부르는 것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미 쓴 글에서 팔로워 한 분이 ‘여대생’이라는 표현에 문제를 제기했다. 예의와 정중으로 메일을 주신 팔로워께 감사를 표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내 의견이든 팔로워 의견이든, 근거를 갖춘 논리적 반론은 환영이지만 감정적 비난은 노탱큐다. 


1980년대 미국에서 PC(Political Correctness)가 등장했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번역한다.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수정하자는 주장이다. 


불구자는 장애인으로, 인디언은 원주민으로, 에스키모는 이누이트로, 스튜어디스는 플라이트 어텐던트로. 


우리나라에선 장애인을 장애우로, 결손가정은 한부모가정으로, 애완동물은 반려동물로 바꾸자는 정도가 되겠다. (정작 장애인들은 자신들을 장애우로 부르는 걸 싫어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PC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조했다. 언어도 많이 수정되었다. 


하지만 마가 끼기 시작한다. 


PC주의자들은 ‘정교한 논리와 설득’이 아니라 ‘비난, 망신 주기, 좌표찍기’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PC의 이념적 기초는 ‘다양성 존중’인데, 정작 자신들은 다른 의견에 ‘적대적으로’ 반응했다. 


그렇게 수십 년을 보낸 결과, PC에 짜증이나 진절머리를 느낀 사람들이 우파로, 그중 10%는 극우파로 집결했다. 그 결과물이 미국의 트럼프, 한국의 누구와 누구다. 


역설적이게도 PC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적대자들의 자양분이 되었다. 어떤 책은 ‘극우파 모집소가 되었다’로 표현하기도 한다. 


PC의 주장은 상당 부분 옳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부모님이 좋아합니다’ = ‘한 부모 가정 차별이다’

‘아기들에게 좋아요’ = ‘유산 경험자에게 상처다’

‘결정 장애다’ = ‘장애인 모독이다’


그런 논리라면 PTSD,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그림은 뚱뚱한 사람들에 대한 모독인가?



트럼프는 이 부분을 파고 들었다. 선거유세 중 ‘메리 크리스마스를 되찾아오겠다’고 선언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PC주의자들은 메리 크리스마스가 타종교 차별이라 반발했다. 기독교가 다종교 상황인 미국이니, 소수 종교에 대한 차별이란 것. 


처음엔 공공기관과 학교에서, 나중엔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메리 크리스마스’가 사라지고 ‘Happy Holidays, Season's Greetings’로 대체된 이유다. 


이게 트럼프 같은 극우에겐 호재였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부활시키겠다는 그의 선언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가 당선된 요인에 얼마 정도를 차지하게 했고, 그 결과는 4년간 목도한 그 미국이다.      


몇몇 뜻있는 교수들이 ‘남학생들’ 성인지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여성학 수업을 개설했는데, 수업 특성상 ‘성인지감수성’이 낮은 용어와 대화, 텍스트가 사용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PC 근본주의자’들은 격렬히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그 수업들은 사라졌다. 


이제 남학생들은 ‘여성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채 사회로 나가게 됐다, 며 교수들은 안타까워했다. 


돌이켜보면 필자가 1990년대 들었던 여성학 수업은, 그래서 필자의 성인지감수성을 높여주었던 수업은, 지금이라면 글쎄...   


어쨌든, 이 모든 일의 결과는 무엇일까? 


차별과 편견의 가장 큰 원인은 ‘구조적이고 사회적’이지만 ‘개인의 윤리적 민감성’ 문제 정도로 축소되고 있다. ‘나쁜놈’으로 욕하고 끝이란 말이다. 


이래선 근본 변화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용어의 올바름이라는 가치에 집착해 지지부진한 논박을 반복하는 사이, ‘나쁜 놈’들은 표현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기막히게 꿰어,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에 이상한 의미를 덧칠하고 있고, 이제 자유는 제 무게에 겨워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    


언어 사용은 큰 문제다. 계속 고쳐나가야 한다. 


하지만 너무 촘촘한 그물망도 곤란하다. ‘여’가 붙는 단어가 그렇다. 지난 100여 년을 제외하고 세상은 언제나 남성들 차지였다. 언어를 만드는 것 역시 남성이라, 당연히 남성성 과잉이다. PC는 이런 단어들을 다 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다.  


하지만 아예 일상 언어가 되어버린 용어에조차 PC 잣대를 들이대는 건,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제 발목 잡을 수 있다. 


간호원을 간호사로 바꿨지만 의사와 간호사의 불균형한 권력 관계는 좁혀지지 않았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로 바꾼 후 동물학대가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없다.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꾼 후 일제 동원교육의 전체주의성이 사라졌을까? 


여고생을 여자 고등학생으로, 여대생을 여자 대학생으로 부르는 것 역시 비슷하다고 본다. 게다가 여대생의 ‘여’를 땠을 때, 그 다음은 전국 여중과 여고에서 ‘여’자를 떼야할 테고, 이화여대와 숙명여대는 이화대와 숙명대로 간판을 교체해야 한다. 


그 다음은? 


거대 문제는 사라지고 말단지엽만 남는다.


1990년대 후반 일이다. 갓 입학한 여자 후배들이 페미니즘 활동에 열심이다. 인문대 앞에 가판을 차리고 후원금을 모은다. 


나름 거금을 쾌척하고 받은 뺏지를 어쩌다보니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 



전투적이다. 맘에 든다. 그때 내가 해줬던 말이다. 


"나는 페미니즘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도 변함없는 믿음이다.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너무도 많은 의미가 덧입혀져 제 무게에 붕괴하고 있다. 전략을 바꾸는 건 어떨까 싶다. 


여대생, 여고생, 여검사, 여전사 등에서 ‘여’를 뗄려고 할 게 아니라, ‘여’가 지닌 가치로 당당히 세상을 바꾸는 것. 왜 그럴까?


우리 사회는 정말 인권 감수성이 부족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 


주요인은 68혁명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인간을 바라보는 혁명적 시각 전환’이 유럽과 미국을 돌아 일본까지 왔지만 한국과 중국에는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양으로 따라가기엔 불가능하다. 질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게 여성성이라 본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기득권을 거머진 늙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건, 여성성,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 믿음이니, 시비는 사절! 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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