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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엘 Sep 25. 2023

아내를 우러러 딱 한 점만 부끄럽기를

가사 노동에 대하여

단어에 숨어 있는 의미가 우리 생각과 관점을 결정한다


개념이 행동을 결정한다


우리가 쓰는 단어를 점검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는 프레임의 지배를 받게 된다          


빨래 건조기, 로봇 청소기, 물걸레 청소기, 식기세척기, 에어프라이어, 스타일러. 생각지도 못한 가전제품들이 등장하면서 가사 노동이 점점 수월해진다. 그러면 가사 노동에 들어가는 시간도 줄었을까?  


세탁기가 없을 땐 더러움을 보는 사회적 시선도 너그러웠다. 빨래가 힘드니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는 게 그리 큰 부끄러움은 아니었다. 


세탁기가 보편화되면서 더러움의 기준은 꾸준히 우상향했고, 우리는 더 자주 세탁기를 돌려야 했다. ‘라떼’는 구겨진 옷이 디폴트값이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입고 다니면 욕먹는다. 즉, 세탁기 등장이 빨래 노동을 혁명적으로 편하게 해줬지만 빨래 노동이 잡아먹는 시간을 줄여주지는 못했다. 


빛(전자기파)으로 음식을 데우는 전자렌지는 돌릴 때마다 감탄이 나오지만 더러워진 내부를 닦을 때는 탄식에 탄식이 줄을 잇는다.   


온갖 가전제품 덕에 가사 노동 강도는 확연히 줄었다. 하지만 가사 노동 시간은 전혀 줄지 않는다. 오히려 늘었다는 미국 데이터도 있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는 아내의 요리 시간만 빼고 아내 가사 노동 시간을 0으로 만드는 게 내 목표다. 좋아하는 식물과 대화하고, 새들과 교감하고, 노래 듣고, 커피 마시고, 책 읽고,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아내는 그런 데만 시간을 썼으면 좋겠다. 


식사를 마친 후 과일까지 먹으면 뒤처리는 내 차례다. 설거지하는 내 뒤에서 예능 보며 깔깔대는 아내가 너무 좋다. 


한 번씩 내 가사 노동을 돕겠다며 청소용 돌돌이를 잡는데, 손이 어색하고 어정쩡하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 이쁘다.


아니, 가사 노동을 ‘돕는다’는 말은 문제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는 의미라면 좋지만 가사 노동 주체가 한쪽으로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오류다. 맞벌이든 외벌이든 간에 말이다.      


“대장부가 마땅히 천하를 청소해야지, 어찌 방 한 칸을 청소하겠는가.”     


중국 한나라 선비 진중거가 한 말이다. 


천하도 청소하고 돌아와선 방도 닦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돌리면 아내가 너무 좋아하지 않을까?


개념이 행동을 규정한다. 개념이 이상하면 이상하게 산다. ('아내를 우러러 딱 한 점만 부끄럽기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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