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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엘 Jun 03. 2024

광해군과 임숙영

역사의 파편에서 오늘을 읽다

1611년 봄에 일어난 일이다. 


과거시험 합격자들 답안지를 슬렁슬렁 훑어보던 광해군, 청년 선비 임숙영이 작성한 답안지를 읽으면서 부들부들 떤다.     


실록 기록에서 핵심을 발췌했고, 긴 내용은 각주로 넣었으며, 필자가 ‘아주 주관적인’ 한 줄 평을 달았다.


_ 임금이 밟고 선 것은 천위(天位)이며, 다스리는 것은 천직(天職)이며, 받들고 있는 것은 천명(天命)이며,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은 천공(天功)이니, 임금은 마음을 움직이고 대사를 일으킴에 반드시 하늘의 도를 본받습니다. (故人君所履者天位, 所治者天職, 所奉者天命, 所勤者天功, 人君動心作事, 必法於天之道)      


= ‘천공’을 잘못 해석하시면 큰일납니다.      


_ 전하께서는 이미 하늘을 본받아야 하는 책무를 가지셨고, 또한 하늘을 본받아야 하는 덕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규방(閨房)을 용인하심으로써 하늘이 전하에게 부여한 위엄이 사랑을 이기는 도가 여기에 이르러 폐하여졌습니다. (今殿下旣有法天之責, 亦有法天之德。 然容忍乎閨房, 而天之以威克厥愛之道與殿下者, 至此而廢矣)      


= 부인과 처가 식구 불법을 용인하니 이 나라에 법과 상식이 사라졌습니다.        


_ 규잠(規箴)을 닫고 막으심에 하늘이 부여한 간언을 따라 성스러워지는 도가 여기에 이르러 폐하여졌습니다. (閉塞乎規箴, 而天之以從諫克聖之道與殿下者, 至此而廢矣)      


= 극우 채널만 구독하고 쓴소리는 멀리하시니 조정에 바른 말이 사라졌습니다.   


_ 달리고 다투는 길을 열어 놓으심으로써 하늘이 전하에게 부여한 오직 현자를 임용하는 도가 여기에 이르러 폐하여졌습니다. (開導乎奔競, 而天之以任官惟賢之道與殿下者, 至此而廢矣)     


= 특정 카르텔 출신만 낙하산으로 꽂으시니 유능한 관리들이 사라졌습니다.         


_ 안일하고 편안함을 즐기심으로써 하늘이 전하에게 부여한 자강 불식하는 도가 여기에 이르러 폐하여졌습니다. (玩愒乎燕安, 而天之以自强不息之道與殿下者, 至此而廢矣)      


= 그렇게 술마시고 놀러다닐 생각 뿐이면, 왜 왕이 되셨습니까?     


_ 이 때문에 충직한 선비가 가슴을 치고 팔을 걷어붙이고 전하를 원망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입니다. (此忠讜之士, 所以痛心扼睕, 不能不恨於殿下者也)     


= 전하 때문에 나라가 개판입니다.            



광해군 부인과 처남, 그리고 이이첨을 싸잡아 비난하는 서슬퍼런 답안지였다.     


굶주린 백성들이 회식 중 토하는 명나라 병사들 토사물을 핥아먹겠다고 달려들고, 사람이 사람을 잡어먹어야 했던 임진왜란이 끝난지 겨우 10년이다. 


전쟁 때보다야 사정이 나아졌지만 백성들 삶은 여전히 피폐했다. 특히 1608년 흉년이 들었고, 코로나보다 독한 전염병들이 간헐적으로 발생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나라 꼴이 이 모양인데도 임금 부인, 임금 부인 가족들, 간신배들은 잡은 권력으로 매일 매일이 파티다.


('사소한 것들의 인문학' 중 '임숙영' 챕터에서 발췌했다. 요즘이 지긋지긋한 분들에게 일독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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