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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lie n Tahoe Jan 27. 2023

어쩐지 너무 순조롭다 했지

Prologue to living in Canada - 02


ENFJ 중에서도 악성 J에 속하는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각본 짜듯 계획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어떤 일에 열정이 생기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몸부터 던지고 본다. 이 불나방 같은 성격 때문에 불필요한 리스크를 떠안은 적도 많지만 긴 시간 동고동락한 반려묘와 함께 캐나다에 정착하기란 고난도 프로젝트가 될 것이고 최대한 눈에 보이는 모든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해야만 했다. 항공권을 일찍이 구매하고 반려동물 동반 서비스 확약을 받았다. 인천-밴쿠버 직항은 두 가지 옵션이 있지만 에어캐나다의 세상 느긋한 시스템에 대한 사람들의 후기를 접한 이상, 비싸더라도 확실한 서비스를 보장하는 대한항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인들은 연고 없는 먼 나라에 고양이를 데려가는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격하게 응원했다. 쉽지 않을 걸 알지만 어쩌겠어, 조그마하고 따뜻한 털뭉치가 내 발목에 기대어 곤히 잠든 모습을 본 5년 전 새벽,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에어캐나다 규정은 반려동물+이동장 무게 총 10kg까지 허용, 비용은 10만 원.

전화로만 예약할 수 있고, 한국 지사는 대기 시간이 매우 길다는 단점이 있다.

대한항공은 총 7kg까지, 비용은 30만 원이지만 온라인으로 간편히 예약할 수 있다.  


출국 전, 아무것도 모르고 서울 숙소의 따스한 카펫을 만끽하던 타호. 공항 체류 시간과 비행까지 무려 20시간을 작은 이동장 안에서 버텨야 했다. 다행히 기내 주변 좌석이 비어있어서 어두운 수면 시간을 틈타 타호를 잠시 안고 있었는데, 보랏빛 밤하늘을 가만가만 바라보는 이 작고 경이로운 생명체가 이 험난한 길에 또 얼마나 큰 힘이 되어줄까 하는 생각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매일 과거와 미래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지금, 현재에 발붙일 수 있게, 가끔은 쉽고 단순하게,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조금 더 오래 주변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나의 고양이.


밴쿠버 공항에 도착하고 입국 심사, 이민국 그리고 검역소까지 거치느라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나 힘들어', '꺼내 줘' 하는 힘겨운 야옹 소리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숙소에 도착하자 집주인이 준비해 준 참치캔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구석에 자리를 잡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그 모습이 안심하기도 잠시, 이틀이 지나자 급성 방광염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타호. 여러 번 겪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인생 가장 큰 위기, 타호가 아프다. 외국에서 동물병원은 처음이라 눈앞이 캄캄했지만, 세상 모든 엄마(집사)는 강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주말 저녁이라 응급실을 찾아야 했고 다행히도 가까운 병원에서 곧바로 진료를 볼 수 있다고 했다. "She'll be okay. Don't worry."  침착하게 타호를 살펴봐준 수의사, 병원 길에 함께 나서 준 숙소 가족들 덕분에 금세 마음이 진정되었다. 수의사가 말한 대로 타호는 병원에 다녀온 몇 시간 뒤 시원하게 화장실을 다녀왔다.


내 꿈과 이기적인 책임감으로 너를 힘든 길에 오르게 해서 미안해. 네 하루가 나에겐 일주일인 만큼 우린 다른 시간 속에 다른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잊지 않을게, 모든 날을 약속할 순 없지만 하루하루를 즐거움과 따뜻함으로 채워가자. 고마워 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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