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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Oct 25. 2024

끝이 없는 싸움의 시작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갔다가 다시 일반 병동에서 아이를 만났다. 다시 만난 아이는 내가 아이를 돌본 것 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잠깐이었지만 조금은 익숙해 진건지 전보다는 잠을 조금 잘 수 있었고, 전보다는 밥을 조금은 먹을 수 있었다. 이젠 엑스레이를 찍으러 오셔도 내가 아이를 들 수 있었고, 유튜브를 보며 신생아 아기 안는 법을 검색하며 어색하지만 아이를 잠시나마 안아보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집으로 가야만 하는 퇴원 날짜가 다가올 수록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일반 병동에서 아이의 응급상황을 몇번이고 겪다보니 집에가서 내가 아이를 의료진 없이 케어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퇴원해야 하는 날짜가 정해졌는데 뉴스에서 그 당시 한창 태풍이 온다는 걸로 떠들썩했고 나는 오죽했으면 태풍이 지나가고 퇴원하면 안되냐고 담당의에게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태풍이 오면 집에가서 응급상황 때 119가 오지 못해서 병원에 못가는 상황이 생길까 무서웠던 거다. 사실 태풍이 오면 사건사고가 많아 119분들은 잘 다니실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웃긴 생각이었다.


태풍이 지나고 퇴원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퇴원을 결정하고 아이가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 날이 다가왔다. 짐을 싸고 사설 구급차를 불러서 침대에 아이를 눕히고 구급차를 타고 집으로 이동하는데 차가 흔들리는 건지 내가 떨려서 흔들거리고 있는건지 모를 정도로 이 상황이 너무나 두려웠다. 병원에서 아이와 함께 벗어났다는 거 자체로 이렇게 불안한데 앞으로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 아이를 집 침대에 눕히고 무슨 정신으로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정신없는 와중에 정말 본능적으로 병동에서 했던 것처럼 집에 있는 석션기계에 카테터를 연결해서 이동하는 동안 쌓인 침과 가래 석션을 했고, 앞으로 집에서 아이의 생명을 책임져줄 인공호흡기(홈벤트) 관리 업체와 가정용산소 관리 업체까지 담당자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 분들을 상대하고 기계를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집에는 시어머니와 이모님, 아가씨, 남편까지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여럿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아이를 모두 처음 대면하는 거였고, 아이를 위해 해야만 하는 모든 의료행위들을 할 줄 아는 건 오롯이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업체들이 돌아가고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처치들을 마무리하고 바닥에 앉아 아이를 가만히 보는데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방 한구석에 앉아서 아이만 케어하고 아이만 바라보다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도 못나갈 꺼고 회사도 다시 복직할 수 없을 거고 내 인생은 여기서 그냥 끝났구나 싶었다.


아이가 집에 오고 아이는 역시나 안정적이지 못했다. 산소포화도가 불안정해서 병동에서는 쓰지도 않은 산소를 24시간 틀어야했고, 홈벤트가 잘 걸리지 않아서 벤트 업체에서 응급으로 밤에 와서 벤트 셋팅을 조정하기도 하고, 퇴원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긴급외래로 호흡기과를 계속 왔다갔다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아이가 불안정하니 나는 집에서 조차도 병원과 동일하게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왜냐면 집에는 아이를 케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나를 교대해줄 사람이 없었으며 새벽에 내가 잠깐 잠들었을 때 석션을 해줄 수 있는 의료진도 없었다. 모든 걸 나 혼자 감당해야했다.


잠을 너무 쪽잠을 자다보니 하루는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다가 깊게 잠들었던 건지 기절을 했던건지 모르겠지만 잠들었다가 갑자기 깼는데 아이 서킷에 물이 고여 아이가 숨을 어렵게 쉬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엄마가 진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었다. 내가 잠깐 졸았을 뿐인데 아이는 생명이 오고갈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점점 피폐해져갔다. 밥도 잘 먹지 않고 방 한구석에 멍하니 앉아서 창밖만 바라보거나 아이 모니터기계의 숫자만 바라보고 있는 날의 연속이었다.


아이는 포화도가 불안정한 것 뿐만 아니라 나를 정말 힘들게 했던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맥박이었다. 어린 아이라 맥박이 좀 높을 수 있다고 하기엔 너무나 높은 상태로 유지가 오래되어서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고, 다만 아이가 그냥 뭔가 힘든거 아닌가 정도로 추측하는데 하루에 몇시간이고 몇번이고 아이가 얼굴이 벌개지고 맥박이 170-180을 넘기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


현재 병원에서 포화도가 떨어지는 것, 맥박이 높아지는 것 등에 대해 이렇다할 해결책을 주지 않으니 나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전부터도 고민했던 거긴 하지만 결정을 못하던 상황이었는데 아이의 컨디션이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니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 큰 결심은 바로 주 병원을 옮기는 것.


주병원을 옮기게 된 이유는 위에 말한 것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거리의 문제와 아이의 희귀질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교수님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라도 듣고 싶었고, 현 병원에 메인과인 호흡기과 교수님에 대한 불신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하는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에 대한 걸 아이를 만나고 항상 하게 되는데 지금도 내가 이때 주병원을 옮긴게 잘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걸 생각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기에 내가 하는 선택이 그저 아이를 위한 최선이길 바랄 뿐이다.


그때의 나는 주 병원을 옮기면 아이가 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었고, 그게 정말 헛된 희망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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