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꼰대와 꼰대
보라카이 여행을 다녀온 나는 돈이 궁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김지윤의 마음속에서, 지금껏 해왔던 일들과 정 반대되는 업종에 대한 무모한 열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는데.. 사무직, 오피스직, 리셉션! 나는 갑작스레 이 세 가지 단어에 꽂혔다. 이곳저곳 검색을 하다 보니,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은 여행업이었다. 계획 충인(충은 충실하다의 충이다) 나에게 맞춤정장처럼 똑 떨어지는 일 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이트를 열심히 뒤져보았으나 많고 많은 여행사들의 제1 조건은 영어능통이었다. 나는.. 도전해보지도 못한 채 실패의 쓴 맛을 경험했다. 고로 여행업을 제외하고서 사무직을 알아보니,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유학원. 이렇게 해서 나의 유학원 생활 실패기가 시작된다. 하하.
유학원에서 일하자고 마음먹은 후 지원한 단 한 곳에 마치 운명처럼 붙었다. 그 유학원은 이민도 함께 대행하는 곳이어서인지 별의별 문의들이 참 많았더랬지. 80세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려는 40대의 여성. 과연 비자가 잘 나올지? 이혼을 세 번 한 사람과 결혼을 하면 장애가 있는 우리 아이가 무리 없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지? 등.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두 페이지는 더 채워야 하기에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유학원은 시드니 시티의 최중심가인 월드스퀘어라는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급이 아닌 월급을 받기로 계약을 했고, 따져보자면 일주일에 $500 불을 받는 셈이었다. 아주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으나 일단은 사무직에 목숨 걸었던 나는 단숨에 오케이를 외쳤다. 하나에 꽂히면 뒤도 안보고 달려드는 불나방, 이런 미련한 김지윤같으니라고!
강 부장은 시드니 지사의 소장 쯤 되는 여자다. 그녀는 외대 아랍어학과를 졸업했고, 본인의 학벌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또한 공부도 잘하는데 놀기까지 잘하는 나, 담배를 아주 맛깔나게 피는 범생이의 나..!라는 콘셉트에 심취해서 살아가는 구닥다리 꼰대이기도 하다.
그녀는 틈만 나면 누군가에게 여자 연예인에 대한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XXX의 스폰서가 바싹 마른 인형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더라 그래서 걔가 그렇게 살을 뺐대. 그리고 걔 있지 이번에 드라마찍은 애 OOO. 걘 진짜 여우래, 그러니 그렇게 많은 남자 연예인들이랑 염문설이 났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혹은 본인의 뇌피셜을) 진실인양 흘리고 다니는 그녀를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 극도로, 격력히! 싫어했다.
여기 내 오른쪽 방향에는 그녀의 발 닦개가 있다. 그의 이름은 최 실장. 최 실장은 100킬로가 넘는 거구의 남자로(확실하게는 모른다. 어쨌든 그래보인다) 회사의 디자인 담당이다. 그의 능력치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정말 구리다.
최 실장의 하루 일과를 읊어본다. 30분가량 늦게 출근하기, 장난 삼아 김지윤 갈구기, 강 부장한테 싸바싸바하기, 밥 먹기, 간식 먹기, 김지윤한테 커피 사 오라 시키기,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믹스커피 또 타서 마시기 등. 강 부장도 싫었지만 나는 최 실장이 더 싫었다. 최 실장은 강 부장의 충실하고 뚱뚱한 수컷 생앙쥐같은 놈이었다.
강 부장 그녀는 종종, 아니 조금 자주 (3개월간 대략 6번은 들은 듯)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담배 폈잖아~ 우리 아빠도 다 아는데 그냥 눈감아줬다니까? 애 공부하는데 스트레스받는다고~"라며 부모 얼굴에 똥칠을 하는 언사를 자랑스레 하곤했다. 그러면 그 옆에 있는 최실장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 역시 그래서~ 부장님이~ 외대에~ 크~" 하는 효과음을 담당했다.
XX하고 자빠졌네. 그 둘의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면 욕이 저절로 나온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그들의 강점은 지옥에서 온 꼰대스러움에있다. 세상에나. 나는 100킬로의 거구 외 두 명의 성인 남성 그리고 셋의 성인 여성이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삼겹살을 혼자 구워본 건 정말이지, 이십몇 년 인생에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힘쓰는 일은 남자가 해야지 여자가 불판 앞에서 고기를 구워야 해?라는 식의 민감한 발언이 아니다. 적어도 고기 판이 두 개라면 한판 정도는, 그 해당 테이블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구워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니던가? 나를 가운데에 앉혀놓고 양판으로 고기를 구우라 시키다니. 50이 다 되어가는 호주 교민들이 이 땅을 밟은 지 갓 3년 된 20대에게. 다시 생각해도 울분이 차오르기에 둘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하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 나는 이 회사에서 잘렸다. 잘린 이유도 소름 돋는다. 강 부장은 종종 나에게 초콜릿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일본 브랜드인 그 초콜릿은 회사에서 지하철로 대략 네다섯 정거장을 가야 했는데 지가 먹을 그 초콜릿을 대체 왜 나한테 사 오라고 하는건지 시킬 거면 교통비라도 주고 시키던가. 꼴랑 주에 500불 주면서 써먹을 수 있는 모든 방면에서 날 부려먹었다.
어느 날 오전, 여느 날과 같이 초콜릿을 사러 갔을 때의 일이다. 강 부장은 나의 피씨 메신저를 뒤져보았다. 그래 뭐, 어쩌면 메신저 잠금을 하지 않고 나간 내 탓일 수도 있겠다. 강 부장은 내가 친구에게 본인 욕(따지자면 욕도 아니었다. '강 부장은 싫지만 밖에 나가는 건 좋다'라는 식의 발언이었다.)을 한 것을 보았다며 나에게 당장 짐을 싸서 나가라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지윤, 너는 내가 왜 싫니?"
여태껏 보고 느끼고 겪은 그녀의 행동들은 전부 묻어놓은채, 그냥 그런 사람도 있으려니 마음먹고서,
나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 했다.
"부장님 저는 부장님이 여자 연예인들에 대해서 근거 없는 소문 흘리고 다니시는 게 싫어요. 그건 잘못된 일이잖아요. 그리고 왜 '여자' 연예인만 욕하시는 거예요?"
강 부장은 소리쳤다.
"야, 그거 다 내가 건너 건너 들은 거라 진짜거든? 그리고 여자 연예인만? 너 요즘 그 뭐, 뭐라더라? 메갈? 메갈이니 너?"
메갈. 메갈이라. 그녀의 물음에 할 말을 잃은 나는 5초간의 침묵을 끝으로 부장님... 저 그냥 갈게요. 하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아마 그녀는 주변인들에게 김지윤 걔 멀쩡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메갈이라 잘랐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할 테지. 이런 미친 회사에 3개월이나 몸담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워 주변인들에게는 '회사가 망했다' 정도로만 알렸으나 실상은 이랬던 것이다.
그렇다. 현재까지 내 인생 최악의 회사는 이 곳이다. 그리고 다음 편 내 인생 최악의 카페가 등장한다. 두구두구 기대하시라.